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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2017. 9. 27. 12:55 - 북북서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사진출처 다음 책.


페미니즘은 옳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며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견이 있다면 어느 부분, 어느 의미에서의 평등을 어떤 수단을 통해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서여야 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타인의 고통을 측정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는 높은 확률로 오만하다. 우리는 더 노력해야 한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은 가장 페미니스트적인 소설 중 하나이다. 1977년 초판이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담고 있는 메시지가 신선하고도 강렬했던 탓에 아직까지도 회자되며 읽히는 책이다. 소위 "미러링"이라는 것의 시초이자 가장 완벽한 예이기도 하다. 가상의 나라 이갈리아에서는 전통적인 성역할이 현실과 정 반대이다. 모든 단어와 호칭, 역할과 권위가 여성중심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남성은 여성의 선택을 받아 순종하도록 교육된다. 여성은 활동적이고 육체적인 활동 역시 즐기는 반면 남성은 화장을 하고 장식이 치렁치렁한 옷을 입는다. 여성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남성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여성은 자연스럽게 가슴을 내놓고 다니지만 남성은 자신의 성기를 가리는 전용 속옷을 입어야 한다. 주인공이 뱃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면 주인공의 어머니는 피우던 시가를 내려놓고 남자가 무슨 뱃사람이냐고 쏘아붙이는 식이다.


브란튼베르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상생활에 쓰는 언어의 성별 표현까지도 반전시킨다. 예를 들면 남자가 man이고 여자가 woman으로 남자가 기본형인 것을 뒤집어 여자를 wom, 남자를 manwom으로 명명한다. 인간은 mankind가 아닌 womkind로 지칭되며 전지전능한 신 역시 여성형인 도나 제시카라 불린다. 한국인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도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달린 성 역시 마찬가지다. 리즈도터Lizdaughter, 메이도터Maydaughter등의 성은 오늘날 영미권에 흔히 존재하는 존슨Johnson, 데이비슨Davidson 등의 남자이름+son을 여자이름+daughter로 치환한 형태이다. 작가가 얼마나 꼼꼼하게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이런 세상에서 이제 막 사춘기를 맞이하는 어린 소년 페트로니우스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가 겪는 차별과 괴로움을 묘사함으로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현실에 상당히 남성중심적인 구도가 숨어 있음을 까발리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야기 자체로서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라 할 수는 없겠만, 배경 자체가 워낙 흥미롭고 현실과 비교해보며 생각할 거리가 많아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기게 된다. 픽션의 본질이 거짓으로서 진실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갈리아의 딸들>은 유쾌하고 강렬한 픽션이다. 자신이 여성혐오를 위시한 젠더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은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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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화난 래퍼들.txt
2017. 9. 25. 23:25 - 북북서





웹 서핑을 하다가 한국 힙합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물론 이건 조크다. 힙합은 주류 음악이 됐고 힙합을 즐겨 듣는 대중은 많다. 하지만 이건 신랄한 조크다. 아닌 게 아니라, 힙합을 흥미로워하는 대중만큼이나 힙합을 거북해하는 대중이 많다. 한국 래퍼들은 밑도 끝도 없이 센 척이나 하는 허세꾼이란 것이다. 까놓고 말해 ‘힙찔이’다. 이 땅에 힙합이 정착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힙합에 면역되지 못하고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 


<쇼미더머니> 시대가 열린 후 방송 흥행을 위해 디스와 스웨거 같은 요소가 자극적으로 선별 노출됐다는 것이 한 이유일 것 같다. 하지만 궁극적인 답을 알려주자면, 장르 문화를 이식하는 지역적 조건, 현지화(localizing)의 문제다. 한국 래퍼들이 유별난 게 아니라, 힙합 가사는 원래 마초적이고 공격적이다. 다만 미국 힙합은 이런 텍스트를 정당화할, 텍스트를 낳은 콘텍스트를 갖고 있다. 힙합의 발상지는 뉴욕의 사우스 브롱크스라는 슬럼가다. 미국 흑인들은 신대륙 시대에 노예 무역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후 줄곧 다인종 국가의 밑바닥 계층으로 살았다. 그들이 사는 슬럼가는 범죄와 가난, 마약이 어슬렁거리는 공동묘지 같은 도시다. 소위 말하는 블랙 뮤직, 래퍼 자신이 가사를 쓰며 사적 화자의 경험을 밝히는 힙합에는 특수한 지역 공동체의 현실이 장렬하게 들끓는다. 이런 장르적 정체성을 음악으로 서사화하는 아이콘이 바로 흑인 거주지를 표상하는 게토와 스트릿이다. 미국 래퍼들은 말로만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총에 맞아 사람이 죽는 걸 보며 자랐다. 내가 얼마나 불행했는지, 그곳에서 어떤 수난을 돌파하며 살아남았는지, 내가 얼마나 위험한 남자인지 노성을 토하고, 남근과 폭력을 찬미하는 장르적 관습은 이렇게 태동했다. 


따라서 다른 국가 공동체, 지역 공동체에서 힙합이란 장르 음악을 창작하는 이들은 장르의 사운드적 재현과 서사적 재현이 일치하는가라는 곤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알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국가 중 하나다. 이곳에는 마약도 총기도 없고 빈민가도 없다. 한국 래퍼들은 부모님에게 용돈을 타 쓰며 급식을 먹고 정규 교육을 이수한 샌님들이다. 그들이 힙합과 더불어 자란 고향은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니라 힙합 플레야 국힙게와 자녹게, 인터넷이다. 게토의 음악을 만들지만 게토라는 공간이 없는 나라에서, 하드코어한 가사가 수입되는 와중 가사의 기의는 거세당하고 기표만 살아남아 음악적 스타일과 클리셰로 쓰인다. 아무리 센 척을 해봐야 맥락이 없는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혼자서 화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여튼 '화를 내기' 위해 허수아비를 향해 종 주먹질하고, 별 두서도 없는 과시형 가사를 쓰고, 심지어 싸이월드 다이어리 험담이 비프로 비화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본토 힙합의 제왕 제이지가 "코카인을 팔아보니 CD를 파는 법도 알겠더군. 난 사업가가 아냐 사업 그 자체지(“I sold kilos of coke, I'm guessin' I can sell CD's. I'm not a businessman; I'm a business, man!")라고 뱉으면 범접할 수 없는 '스웨거'가 흘러넘치지만, 한국 MC들은 스웨거는 부리고 싶은데 근거가 될 배경 서사가 없으니 눈알만 부릅뜬다. 


이건 미국 MC들이 모조리 갱스터란 말이 아니다. 마약왕을 자부하다 교도관 출신인 게 탄로 나 개망신당한 릭 로스의 경우처럼 갱스터는 자격 있는 자가 쓰는 왕관인 한편, 갱스터 가사는 연기자가 배역을 수행하듯 역할 유희로 소비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엔터테인먼트에 개연성과 몰입감을 받쳐 주는 콘텍스트를 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고담 시도 배트맨도 없다. 하지만 서부 개척 시대와 연방 정부 수립 이래로 자경단이 활동한 역사적 ᆞ사회적 배경이 있다. 한국처럼 중앙 권력의 장악력이 촘촘하고 치안이 좋은 나라에선 <배트맨> 같은 자경단 서사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일까, 이곳엔 게토가 없으니까 게토의 음악 같은 건 집어치우자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스타일과 클리셰를 재현하는 데도 의의가 있다. 현재 힙합의 수요가 확장된 건 껍데기의 요염한 감촉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만큼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 힙합은 스타일과 클리셰에 지나치게 편중된 상태다. 게다가 이런 양식적 매력도 콘텍스트의 차이 때문에 몰입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요령 있게 처리해야 제대로 연출할 수 있다. 논점의 핵심은 현재 많은 한국 래퍼들의 작업물에서 로컬라이징이란 의제를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컬라이징은 하나의 제약 사항이다. 창작에 따른 제약은 창작의 전망과 행동반경을 좁히는 장애물이지만, 창작자에게 미션을 제시하며 영감과 도전의식을 북돋기도 한다. 형형색색으로 엉클어진 큐브를 맞추듯 좁은 조건을 뚫어내며 창작은 고차원의 작업으로 승화되고, 그 미션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클리어 해 보이는 묘미도 있다. 이건 랩 가사를 쓰는 데 라임이란 제약이 붙는 것과 그 뿌리에서 다를 것이 없다. 서로 다른 지역적 조건을 간파하여 장르적 변용을 이루거나 그 조건을 뛰어넘으며 매력과 설득력을 갖춘 음악을 만드는 것이 한국 힙합의 미션이다. 


사실 이런 방식의 변용은 상이한 환경에서 창작을 하는 이상, 창작자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게 꼭 난해한 숙제만은 아니다. 한국 힙합이 태동한 90년대부터 00년대 중반까지는 로컬라이징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시기다. 특히 00년 초반까지는 한국에 존재한 적 없던 이 미지의 음악을 어떻게 ‘한국적’으로 이해하고 다뤄 볼 것인지가 뜨거운 논제였다. 이후 소울컴퍼니 등의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은 동년배 10·20대들의 현실과 창작의 고뇌를 말하는 가사를 썼고, 무브먼트 소속 오버 래퍼들은 삶에 대한 자조와 격려, 사랑 이야기 같은 보편적 주제로 호소력을 얻었다. 이는 미국 힙합 신과의 음악적·산업적·문화적 격차로 미국적 관습이 도래하지 못한 저발전의 상태가 낳은 역설적 풍요였고, 한편으론 미국적 관습을 포기하며 별도의 의제로 창작 활동을 한 것이다. 가령 키비가 2003년 발표한 ‘소년을 위로해줘’는 남성성의 사회적 강요에 저항하는 소년의 우울함을 토로하는 노래다. 당시엔 미국 힙합에 접근할 수 있는 인프라가 빈약해 정작 창작자들이 미국적 관습에 어두웠을 것이란 추정도 해볼 수 있다. 


반면 비교적 번역하기 용이한 관습들은 익히 로컬라이징 된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관습들은 예외없이 한국적 콘텍스트에 따라 변형되었다. DOC가 2000년에 발표한 '포조리'는 N.W.A의 'Fuck Tha Police'로 상징되는 미국 힙합의 치안 기구에 대한 대결의식을 재현한 시도라고 평할 수 있다. 게토는 다인종 국가가 관리하는 국가 내부의 식민지이고, 경찰은 불심검문과 상습적 구타로 흑인들을 억압해왔다. 'Fuck Tha Police'는 흑인들에 대한 치안 기구의 폭력 속에 태어난 트랙이다. N.W.A가 투어 공연을 할 때 경찰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현장을 감시했다. 한국의 치안 기구는 국민들과 이런 억압적 관계에 있지 않고 강제력의 행사도 제한적이다. 오히려 ‘짭새’라는 멸칭에서 알 수 있듯 무능하고 부패한 공권력으로 조롱당하고는 한다. '포조리'가 야유하는 건 이런 공권력의 악취다. 'Fuck Tha Police'가 경찰의 인종 차별과 일상적 억압에 도전하는 곡이라면, ‘포조리’는 사회면 뉴스에 떠도는 거시적이고 단편적인 이슈(신창원 사건, 총기 발포 사고, 조폭과 붙어먹기)로 비리를 야유하는 세태 풍자곡이 되었다. 


이 대목은 힙합의 저항정신이란 관습과도 직결된다. 힙합의 저항정신이란 곧 미국 흑인들이 처한 인종적 소수자의 자의식이며, 억압적 백인 사회를 향한 분노다. 한국 래퍼들은 계층적 자의식이 없는 보편적 정체성의 자리에서 저항정신을 전용했다. 민주화 항쟁과 노동 운동에서 비롯한 저항적 민중문화의 코드와 결합하고(MC 스나이퍼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사로 지식인 이미지를 치장하고(타블로 'Lesson' 시리즈) 비민주적 정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에 합류하고(이명박근혜를 비판한 트랙들, 제리케이의 ‘우민 정책’과 ‘하야해’) 보편적 이슈에 대한 사회 비평을 개진하였다(UMC UW 'Media Doll' 시리즈, 제리케이 ‘콜 센터’). 


한편 한국에선 인터넷이 힙합의 본거지로서 유사 게토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런 기능은 00년대 후반 경 심화됐고, 이를 주도한 것은 당대의 핵심 인물 버벌진트였다. 그는 자신이 겪은 수난의 무대로 스트릿이 아닌 리드머, 디씨 트라이브, 힙합 플레이야 같은 힙합 커뮤니티를 지목하며 네가티브한 에너지를 발사했다. 불특정 다수 커뮤니티 유저를 날 음해하는 '방구석 헤이러'라 부르는 한국형 배틀랩의 관용구가 입안되었고 지금은 클리셰로 쓰인다. 같은 시기, 돈과 여자가 아닌 음악적 실력을 소재로 자기 과시가 재현되었는데, 유교적 위계질서가 힙합 신에도 뿌리 내린 상황에서 이 새로운 관습은 스캔들과 해프닝을 일으키며 내부적 반발에 휘말렸다. 얄궂게도 버벌진트는 "한국화된 해외 음식을 경멸한다"는 비유를 입에 물고 장르의 원형을 관철해야 한다 주장하는 '장르 사대주의자'였다. 그런 그도 현지화를 통해서야 본토의 관습을 몸소 누려보는 소망을 이룬 셈이다. 


2010년대 <쇼미더머니> 시대가 열린 후 한국 힙합은 ‘전면적 미국화’라는 길로 진입했다. 허슬과 스웨거, 돈과 여자, 남근의 찬미 같은 개념이 무더기로 수입됐고, 이런 미국적 관습을 어떻게 고유한 매력을 보존한 채 로컬라이징 할 것이냐는 보다 까다로운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동시대 래퍼 가운데 미국 힙합의 관습을 가장 열렬하게 신봉하는 음악가는 일리네어다. 그들은 스웨거 힙합이 한국에서 낯설던 2010년대 초반부터 초지일관 돈 자랑 가사, 으스대는 가사를 썼다. 그때만 해도 힙합은 비주류에 가까웠고 그들의 연 수익은 고작 1~2억이었다. 때문에 “지네가 지드래곤이야, 제이지야. 벌면 얼마나 번다고 돈타령을 해.”라는 리스너들의 불복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리네어는 부단한 창작과 자기 포장을 통해 몸값을 높여왔다. <쇼미더머니>의 도래에 의지해 이제 랩 머니는 수십억대로 치솟았고, 스웨거 힙합은 한국 힙합을 획일화했다. 이것은 도끼와 콰이엇이 본토의 관습을 선구적으로 퍼트린 결실이기도 하지만, 그들 스스로 본토의 관습을 설득력 있게 재현할 콘텍스트를 창출한 측면도 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집념에도 불구하고 일리네어조차 본토의 관습을 백 퍼센트 재현하진 않았다(혹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리네어식 돈자랑 가사는 겸손을 강요하고 물질을 향한 탐욕의 드러냄을 배격하는 한국에서 사회적 거부감을 피하기 힘들다. 데프콘이 ‘프랑켄슈타인’으로 도끼의 졸부 근성을 디스한 건 그런 잠재적 여론이 개별 음악가의 창작을 통해 불거진 사건이다. 도끼가 이런 무형의 압박에 대답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의외로 바른생활 이미지다. 나는 남에게 피해도 안 주고 흥청망청 대지도 않으며 성실하게 산다고 웅변하는 것이다(“난 술 담배 안 해. 쌍스러운 욕도 입으로 안 뱉어. 난 싸우지도 않아. (...) 열심히 일하며 살 뿐 낭비 않네.”, ‘111%’ 중에서) 본토의 래퍼들은 서슴없이 낭비를 자랑하고, 마약과 범법, 향락을 가사에 절여낸다. 하지만 도끼는 “마약 조사와도 검찰들은 날 못 잡네. 생긴 거완 다르게 바르게 살아왔네.”라고 자신이 사회 질서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점에서 일리네어의 돈벌이 캐릭터는 게토의 허슬러보다 근면한 젊은 사업가에 가깝다. 




스웨거 힙합의 득세와 함께 한국 힙합의 미국 힙합 되기는 전면화했다. 스웨거 같은 주제의식에 머물지 않고 소재와 표현의 클리셰를 따라가고, 때론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을 따라 읊는 경우도 보인다. 이건 '힙합 LE 뮤비 자막' 인프라가 보급되어 본토의 동향에 용이하게 접근하게 된 세대가 주축을 이루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 중 하나는 자신의 출신지를 외치는 한국 래퍼들이 예전에 비해 늘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 힙합 신은 동부와 서부, 남부, 브루클린과 컴튼, 왓츠, 애틀랜타 같은 출신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그것을 비트 위에서 외친다. 저 도시들은 힙합의 발상지이거나 생활환경과 음악 활동이 연계된 토대가 단단하다. 하지만 로컬 신이 없다시피 한 한국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가사는 메아리 잃은 외침에 그친다. 


리듬파워가 방사능으로 활동하던 2010년에 발표한 앨범 ‘리듬파워’는 래퍼의 출신지를 본격적으로 외친 선구자격이다. 앨범에 수록된 ‘인천 상륙작전’은 월미도 바이킹과 오이도 같은 구체적 기호를 통해 지역색을 어필하는 데 성공한 편이다. 하지만 멤버 보이비는 힙합 LE, 힙합 플레이야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래퍼들이 출신지를 외치는 걸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사실 인천에 그렇게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로컬 신의 부재는 그 후 데뷔한 '힙합 LE 세대'에게서 적나라하다. 씨잼이 제주도에서 왔다고 말할 때, 제주도가 힙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제주도에서 음악을 한 적도 없고, 자신이 만드는 음악에 아무런 지역색이 들어 있지도 않다. 심지어 창모는 자신의 동네 경기도 덕소리의 주변부적 성격을 강조하며 서울에서 귀하게 자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니 삶이 무슨 할렘이노?"라고 비난한다. 그렇게 치면 덕소리는 무슨 할렘인가? 그냥 수도권 변두리 중 하나지. 창모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을 만큼 곱게 자란 몸 아닌가? 한반도에서 물리적 악조건을 할렘에 비견할 수 있는 곳은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 밖에 없다. 다들 학교랑 학원을 오가다 홈레코딩 마이크 구입하며 랩 시작한 거 뻔히 아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한국 힙합 신에 로컬적 특색을 더하려 한 시도는 예전부터 드물게 있었다. 서울 홍대를 제외하고 로컬 신이라 할 만한 곳은 DMS 크루가 활동한 부산과 클럽 힙합 트레인이 있는 대구다. 이 두 지역 출신 뮤지션 다수가 언더 신과 상업 신에서 활동하고 있다. MC 메타와 이센스, 마이노스, 사이먼 도미닉, 킵루츠가 대표적이다. 이센스와 마이노스는 'U Never Know'에서 조인트 하며 'Represent 대구, Represent 힙합 트레인'을 외쳤고, 제이통은 자신이 South Side 남쪽(부산)에서 왔다며 구체적 캐릭터를 형상화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대구 사투리로 라이밍을 한 MC 메타의 '무까끼하이'다. 하지만 이런 간헐적 움직임이 일관된 흐름으로 지속되진 않았다. 로컬 신의 기반을 강화하기보다 중심부의 음악에 곁 반찬으로 차려졌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최근 나타나는 '출신지 Represent'가 주는 교훈은 이렇다. 어떤 장르적 요소를 재현할 때 자신이 음악을 하는 '장소'의 조건을 고려하여 음악적 내용과 맞물리도록 설계하지 않으면 재현을 위한 재현, 알맹이 없는 클리셰에 머문다. 더 나쁘게는 '본토 힙합'의 스웨거를 흉내 내보는 자기만족에 빠진다. 알다시피 이런 음악은 감흥이 아니라 실소를 준다. 다만 한국 힙합이 급격히 상업화·미국화하는 절정에 이른 지금 상황은 흥미롭고 말할 거리가 넘친다. 창작자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 수행하는 창작의 패턴과 자신이 처한 창작의 조건을 일깨워 주고, 짜임새 있는 음악을 만들도록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 장르 비평의 역할일 것이다. 




자신이 처한 지역적 현실을 의식하고 장르적 로컬라이징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흔치 않은 사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블랙넛이고 하나는 <쇼미더머니>의 신성 우원재다. 


힙합에는 스트릿 크레드(street credibility)라는 관습이 있다. 직역하면 거리에서의 명성이다. 범죄와 마약, 가난의 소굴 게토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누가 더 위험하고 준법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는지 채점하며 남근의 크기를 겨루는 척도다. 말했듯이 게토 같은 빈민가-범법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스트릿 크레드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없다. 거론할 수 있는 전과 이력이 없다 보니 스윙스처럼 ‘센 캐릭터’의 진정성을 증명하려고 학창 시절 일진이었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다. 혹은 마약 전과를 가진 미국 래퍼는 스트릿 크레드를 가산받지만, 이센스는 울면서 참회의 기자회견을 했다. ‘모솔’에 ‘아싸’를 자처하며 남근의 강력함이 아니라 남근의 비루함을 고백하는 블랙넛은 이런 로컬라이징의 난관을 손쉽게 우회한다.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닌 인터넷 동호회가 장르적 발상지이며, 믹스테이프 배포와 MC들의 교류가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지역적 실정 또한, 자녹게 출신에 인터넷 하위문화를 재현하는 블랙넛의 캐릭터와 맞아떨어진다. 


블랙넛은 자신을 에미넴에 비견하고는 하는데, 사실 적절한 비유다. 인종적 정체성이 배타적이며 인종적 권력관계가 물구나무서는 블랙뮤직 커뮤니티에서, 백인은 음악적·남근적 자격을 인준받지 못하는 '소수 인종'이다. 라킴의 말처럼 나스가 거리에서 자라나 거리의 이야기를 한다면 에미넴은 그와 다른 성장배경을 갖고 있다. 거리에서의 삶을 회고할 수도 거리의 형제들을 호명할 수도 없다. 에미넴은 이혼한 부인과 자신의 어머니, 유명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저격하고 백인 쓰레기라 자칭한다. 스트릿 크레드를 획득할 수 없는 태생적 조건을 미치광이 광대 캐릭터로 대신하며 승부를 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현실에 밀착된 방식으로 남성성이란 화두를 추구하면 갱스터와 마약상이 아니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인정투쟁을 벌이는 ‘아다’가 탄생한다. 


뿐만 아니라 블랙넛은 로컬라이징이란 의제를 명확히 자각하고 그 자체를 창작의 서브 테마로 가지고 노는 래퍼이다. 그가 부른 ‘배치기’는 싸구려 토종 힙합의 대명사 그룹 배치기의 이름을 가져온 곡인데, 그는 역시 한국적 사이비 힙합 ‘발라드 랩’을 부르며 “힙합은 원래 그런 게 아닌데 막 총 쏘고 대마초 빨고 해야 개간지인데 너를 위해서라면 나 막귀가 될게 너를 위해 나 신토불이할게, 꺼져 eminem”이라고 풍자한다. 미국과 한국의 콘텍스트 차이와 그에 따른 텍스트의 간극에 대한 장르 비평을 음악을 통해 개진한 것이며, 자기 음악의 폭력성이 실은 미국적 관습의 본질일 뿐이라고 비꼬는 것이다. 블랙넛은 간악하지만 굉장히 영리한 래퍼다. 


하지만 보다 성숙한 방식으로 로컬라이징을 수행하는 건 우원재 '시차'다. 그가 이 노래에서 미국 힙합의 관습 ‘허슬’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라. 우원재가 작사에 접근하는 방향이 다른 래퍼들과 어떻게 다른지, 대중이 왜 우원재의 가사에 새롭다며 호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허슬'의 용례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며 돈벌이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힙합이란 음악이 할렘가를 벗어나는 동아줄이며, 개인의 수완 외에 가난을 극복할 방도가 없는 미국 흑인들의 현실이 낳은 관습이다. 때문에 허슬은 마약 판매 같은 불법적 행위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국 지향적 경향이 심화된 쇼미더머니 시대에 허슬은 스웨거만큼 자주 들먹여지는 클리셰로 수입됐다. 하지만 게토가 없는 한국에서 허슬은 음악적 다작을 칭하는 의미로 한정됐고 지역적 현실과 융합되지 않고 있다. "돈 벌어 돈 벌어" "나 죽고 나서 쉴게" “커져가는 돈벌이 돈 돈 돈벌이 워!”처럼 서사적 설득력이 아닌 동어반복의 상투성을 전시한다. "한국 힙합은 다 똑같다, 허세다"라는 대중의 피로감은 이해가 간다. 


우원재 '시차'는 작업에 몰두한다는 허슬의 요점만 취하고 가사의 배경과 내용을 자신의 현실에 맞게 조율한다. 그는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거리를 활보하는 게토의 마약상이 아니라, 교수님의 꾸중 때문에 문신을 감추고 강의실에 가는 힙합동아리 대학생이다. 밤을 새워 모니터 앞에서 랩 하고 뜬 눈으로 다시 강의실에 가는 게 그의 일과다. 그가 허슬을 통해 저항하는 것은 게토의 가난과 경찰이 아니라 모든 이의 일과를 한 가지 패턴의 초침에 맞추는 한국의 평생 입시제도다. "일찍 일어나야 성공한다"는 사회에서, 밤과 낮을 바꾸며 자신 만의 꿈을 뜬 눈으로 꾸고 있다. 이건 홍대 힙합 동아리라는 우원재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지만 보편적 공감대가 강력하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라면 무언가를 떠안으며 혹은 무언가로 탈출하며 낮과 밤의 시차를 바꾼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과제 수행이건 시험공부이건 공모전 준비이건 편의점 알바이건 취미 활동이건 간에 말이다. 이곳은 불면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는 에너지 드링크의 과용이 이슈가 되는 사회 아닌가. "난 쟤들이 돈 주고 가는 파리의 시간을 사는 중이라 전해"라는 가사는 듣는 이들의 고되고 하찮은 일상을 낭만적 여행지로 초대하고 그들의 어깨를 두들겨 준다. 


창모가 ‘난 비닐하우스 출신 허슬러 돈 훔쳐’라고 하면 “니가?”란 말이 튀어나오고, 오케이션이 "돈 못 벌면 뒈지기로"라고 하면 "어쩌라고?" 싶고, 스윙스가 ‘게으른 래퍼’들 욕하며 잘 먹고 잘 산다고 뻐기면 “너 잘 났다”는 생각만 든다. 하지만 우원재와 로꼬가 '사호선 첫차를 타고 집에 간다'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티브이 속 랩스타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이렇듯 창작자의 개별성과 듣는 이의 개별성이 접속되며 보편성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래퍼가 직접 가사를 쓰는 작사 양식을 지닌 힙합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많은 래퍼들은 이미 돈더미에 오른 '과거완료형'의 가사로 허슬을 과시하고 이유도 없이 "혼자 화나"있다. 하지만 우원재는 세상의 비웃음을 올려다보는 ‘현재 진행형’의 가사로 자신의 왜소함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에 불복한다. 그는 게토의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자살률과 감정노동의 나라에서 정신적 폭력에 쫓기며 '알약'을 복용한다. 이런 진솔한 스탠스가 서정적 표현력과 어울려 “모두 비웃었던 동방의 소음이 어느새 전국을 울려대”라는 단 한 줄의 자기과시에 울림을 불어넣는 것이다. 


블랙넛이 열등감에 찬 캐릭터를 방패 삼아 나 보다 약한 자를 괴롭힌다면, 우원재는 항상 악과 분노에 받혀있지만 누구도 모욕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의 지배적 질서라는 나 보다 거대한 대상을 노려보고 삿대질하며 듣는 이에게 통렬함을 준다. '시차'는 근래 상업 차트에 오른 힙합 트랙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독창적이며 떳떳한 가사적 성취를 이뤘다. 한국 래퍼들은 이 신참 래퍼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야 한다. 



출처 https://brunch.co.kr/@mcwannabe/122


소위 스웩이라는 것에 피로감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킬링파트는 창모의 덕소리 스웩에 관한 일침. 우원재를 지나치게 고평가한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뭐, 그만큼 올해 그의 임팩트는 상당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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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 골든 서클(2017)
2017. 9. 25. 08:11 - 북북서


<킹스맨 : 골든 서클>, 2017, 매튜 본

사진출처 다음영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어느 정도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킹스맨>은 본질적으로 정치인들의 머리가 엘가의 음악에 맞춰 터져나가고 양 다리에 칼 의족을 단 여자가 비밀요원들을 두동강내는 영화였다. 이런 난폭한 영화가 그토록 대중적으로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강한 B급 테이스트를 완충해 줄 "매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폭주하는 똘끼와 키치함에 수트를 입히고 구두를 신겨 까리하게 꾸민 그 특유의 스타일리시함이야말로 <킹스맨>의 정체성이자 매력이었으며, 동시에 이 영화가 신선한 수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킹스맨 : 골든 서클>역시 처음엔 <킹스맨>이 개척해놓은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하면 영국 전역의 킹스맨 본부가 미사일을 맞아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전 세계의 마약시장을 배후에서 장악한 싸이코패스 마약왕 미스 포피다. 그녀는 자신의 마약을 이용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 전편 마지막에서 구출해낸 스웨덴 공주 틸드와 행복한 동거 중이던 에그시는 살아남은 킹스맨 요원들을 규합하고 미국의 비밀 요원 스테이츠맨들과 함께 미스 포피의 계획을 저지해야 한다.


<킹스맨 : 골든 서클>, 사진출처 IMDB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처음에는 희미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위화감이 커진다. 그러다 미국의 비밀조직인 스테이츠맨이 등장하는 순간 폭발한다. 이것은 병맛이다. <킹스맨 : 골든 서클>은 거의 병맛 코미디 영화다. <골든 서클>의 B급 병맛 감성은 <킹스맨>의 그것에 비해 훨씬 말초적이고 저속하다. 전체적으로 많이 미국스러우며 개그의 색감도 한층 다채로워졌다. 센스 자체도 나쁘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지는 미국식 개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많이 웃을 수 있겠다고도 생각한다. 그 화룡정점은 역시 엘튼 존이다. 카메오라더니 분량이나 역할은 웬만한 조연보다 많다. 조금 안 보인다 싶으면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며 등장해 관객의 정신을 아득하게 한다. 조심스럽게 예측해보자면 매튜 본은 이번에 거의 진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킹스맨>도 전혀 진지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지한 척을 할 수는 있는 영화였다. <골든 서클>은 아니다. 


요는 균형감각의 부재이다. <킹스맨>이 A급의 외형과 B급의 본질 간의 교묘한 결합이었다는 이야기는 처음에 했다. <골든 서클>이 전작의 성공을 이어가려면 한층 진해진 병맛 B급 테이스트를 다른 영화적 요소가 완충해줘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액션은 좋다. 하지만 전편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나 롱테이크 교회 시퀀스같이 방점을 찍어 줄 만한 장면이 없다. 악역은? 역시 발렌타인과 가젤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하다. 싸이코패스 마약왕 미스 포피는 그 설정이나 역할만 보면 정말 좋은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화면을 할애받지 못한다. 엘튼 존의 의아하리만치 많은 분량을 떠올려보면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다. 줄리안 무어는 그 적은 분량에서도 최선의 연기를 해 주지만 안타깝게도 초반부가 지나가면 어떤 임팩트를 남기지는 못하며, 캐릭터성이나 존재감이 이상하게 희미한 찰리 역시 제대로 된 악역 구실을 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골든 서클> 마케팅의 한 축인 스테이츠맨은 어떤가 하면, 스테이츠맨은 더 나쁘다. 


<킹스맨 : 골든 서클>, 사진출처 IMDB


스테이츠맨은 이야기상 어떤 역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부터 설정까지, 그들은 철저히 개그를 위해 만들어진 움직이는 스테레오타입이며 분량 자체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영화가 내뿜는 미국식 B급 코미디의 바이브는 80% 스테이츠맨에서 나온다. 물론 패러디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캐릭터 자체가 패러디를 위한 소모품이라면 그것은 약점이 된다. 플롯을 이끌 인물이 없으니 이야기 자체가 얄팍해진다는 것이다. 고작 이런 캐릭터들을 위해 아카데미 수상자인 할리 베리와 제프 브리지스, <폭스 캐처>와 <헤이트풀8>으로 입지를 다진 채닝 테이텀을 캐스팅했다는 게 의아할 정도다. 페드로 파스칼의 캐릭터는 그나마 상황이 낫지만 역시 뻔한 기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후반부 밝혀지는 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코미디였다. 


<골든 서클>은 안타깝게도 <킹스맨>의 성공을 가능케 했던 놀라운 내적 균형이 무너진 영화다. A급의 만듦새는 약해졌고 B급의 본질은 더 진해졌다. 영화가 B급 테이스트에 매몰되었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분명 <킹스맨>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매너"는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재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쉴새없이 파고드는 B급 취향의 개그는 유쾌하고 다채로운 대중 문화의 인용은 군데군데 교묘하며 직관적이면서도 화려한 액션은 여전히 좋다. 전편에 비하면 조금 모양이 빠지게 나오지만 콜린 퍼스 역시 여전히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썩 재밌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킹스맨>이 아닐 뿐이다.


<킹스맨 : 골든 서클>, 사진출처 IMDB


덧. 전작 <킹스맨>에서 마지막 힐드 공주의 애널 섹스 대사와 관련해 논란이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골든 서클>은 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조금 편집될 것 같기는 하지만(미국판 기준으로 쓴다) 상당히 의문스러운 설정과 그에 따른 노골적인 장면이 있으며 그 행위의 대상이 되는 여자 캐릭터 역시 어떤 도구로 소모될 뿐 어떤 캐릭터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전편에서 다름 에그시의 라이벌이었던 록시의 대우 역시 상당히 미묘하다. 자신이 문화예술에서 성차별과 관련한 문제에 예민하다면 주의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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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길라잡이 4편
2017. 9. 21. 07:31 - 북북서


해피해킹 타입-S 타건 영상. 출처 유투브 KeyChatter.com.

◆ 배열로 분류하기

1. 풀배열 키보드

필코 마제스터치 2 하쿠아. 사진 출처 Mechanicalkeyboards.com


가장 일반적인 배열로 풀사이즈 키보드, 혹은 100% 키보드라고도 한다. 기본 문자키와 숫자열, 펑션키(F1~F12), 방향키, 그 위의 기능키 여섯 개, 그리고 오른쪽의 숫자패드까지 모두 포함한 배열이다. 국가별, 그리고 제조사별로 키보드의 구체적인 배열이 조금씩 다르게 때문에 정확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나 보통 104 ~ 108키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간혹 게이밍 키보드들이 이 108키에 더해 추가적으로 매크로 키라던지 볼륨 조절 키 등 특수 키들을 더 달고 나오는 경우가 있으나 유의미한 구분을 하지는 않는다.

장점 필요한 모든 키가 다 달려있기 때문에 가장 무난하며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장 편한 배열이다. 키캡을 갈아끼우기에도 편리하다.

단점 딱히 없으나 굳이 찾으라면 책상 위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크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2. 텐키리스 키보드

필코 마제스터치 크림치즈 텐키리스. 사진 출처 Mechanicalkeyboards.com.


풀배열 키보드에서 우측의 숫자패드(텐키)가 제거된 형태로, 그래서 텐키가 없다는 뜻의 텐키리스(Tenkeyless)라고 한다. 80%의 사이즈라고 80% 키보드, 혹은 최초의 텐키리스 키보드였던 IBM의 SpaceSaver 모델을 따라 세이버 키보드라고도 부른다. 


장점 우측의 숫자패드가 빠졌기 때문에 길이가 짧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기존 풀배열 키보드는 키보드의 타이핑하는 영역과 마우스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장시간 타이핑을 할 때 몸이 왼쪽으로 쏠려 불편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텐키리스의 경우엔 마우스가 방향키 바로 옆에 붙게 되므로 그런 걱정이 훨씬 덜하다. 길이가 짧으니 책상에서 차지하는 크기도 작다.


단점 우측의 숫자패드가 빠졌기 때문에 숫자를 입력할 때 반드시 위의 숫자열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이 큰 단점이다. 짧은 숫자라면 별 문제 없겠으나 긴 숫자를 자주 입력해야 하는 사람의 경우 굉장히 불편해지는 수가 있으므로 주의.



3. 미니 키보드


해피해킹 프로페셔널2. 사진 출처 아마존.


텐키리스에서 조금 더 극단적으로 크기를 줄인 형태이다. 60% 키보드라고도 하며 보통 방향키과 방향키 위의 기능키, 그리고 맨 위의 펑션키 열까지 없앤 경우가 많다. 구체적인 레이아웃의 형태는 제조사마다, 키보드마다 다르며 미니 배열에 방향키를 우겨 넣은 배열, 방향키와 페이지 업, 다운 키를 넣은 배열, 아니면 더욱 극단적으로 문자열과 최소한의 기능키만을 넣은 배열 등 천차만별이다. 


기본적인 미니 레이아웃인 볼텍스 포커 3. 사진 출처 Mechanicalkeyboards.com.


볼텍스 레이서 3. 방향키와 기능키를 어떻게든 우측에 우겨넣었다. 사진출처 아마존.


반면 레오폴드의 FC660C는 방향키와 Insert/Delete를 남겨놓은 형태. 사진 출처 Mechanicalkeyboards.com



가장 극단적인 볼텍스의 코어 40% 모델은 숫자열까지 없애버렸다. 사진출처 아마존.



장점 작다. 작고 컴팩트하기 때문에 일하는 공간의 정리가 가장 깔끔하며 가지고 다니기에도 좋다. 또한 일반 키보드와는 전혀 다른 예쁘고 힙한 생김새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단점 역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열이 아니고 키들이 많이 삭제된 형태이기 때문에 풀배열 혹은 텐키리스 키보드만 쓰던 사람이 접하면 매우 난감하다. 물론 펑션 버튼과 조합하면 불가능한 것은 없으나 당장 저 키보드로 문서작업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각종 단축키를 평소처럼 쓸 수 있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물론 이는 오래 사용하면 익숙해지는 부분이며 변태배열로 유명한 해피해킹 사용자 중에는 단언컨대 해피해킹이야말로 완벽한 배열의 키보드라 주장하기도 하니 사람의 적응력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다.



4. 기타 배열


POS 배열


AKC 114. 사진 출처 Access-is.com.


편의점이나 백화점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다. POS(Point of sales, 판매시점관리)를 위해 쓰이는 키보드로 부가적인 키도 많고 배열 자체도 제각각 다르다. 일반적인 사용자가 접할 이유는 전혀 없는 키보드 배열이나 간혹 게이머들이나 작곡가 등 많은 단축키를 쓰는 사람들이 하나 구해다가 키바인딩을 해놓고 쓰는 경우가 있다.



인체공학적 배열



키네시스 어드밴티지 2. 사진 출처 아마존


어고노믹 키보드(Ergonomic Keyboard)라고 하며 손목과 손가락에 가장 무리가 가지 않는 배열을 추구해 만들어진 키보드들이다. 이것도 물론 제조사마다, 제품마다 디자인과 배열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오른손과 왼손을 분리하며 각각 손을 한번 얹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만 뻗어 원하는 키를 누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배열


레오폴드 FC980M. 사진 출처 Mechanicalkeyboards.com


말 그대로 정형화된 배열이 아니어서 딱히 뭐라고 이름을 붙이기 애매한 배열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윗 사진의 FC980M이다. 얼핏 보면 텐키리스 같지만 사실 텐키는 있으며 대신 텐키와 문자키 사이에 들어가는 기능키를 깔끔히 날려 버렸다. 오른쪽 아래의 한/영키나 한자 키, 쉬프트 키의 사이즈와 위치를 조절해 공간을 만든 다음 거기에 방향키를 박아넣은 건 덤이다. 풀배열도 아니고 텐키가 있으니 텐키리스도 아니니 이걸 대체 뭐라 불러야 하는가. 굳이 따지자면 80% 키보드라는 명칭이 가장 근접할 것 같기는 한데...


여하튼 이처럼 제조사 별로 비정형화된 배열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냥 어떤 이점이 있길래 이런 배열이 나왔는지를 파악하면 되겠다. 대신 이런 경우 기존의 기성품 키캡이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각 제조사별 특징과 추천 모델을 알아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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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텍스 코어 청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Rhinofeed 채널.


 작동방식으로 분류하기(계속)


5. 정전용량 무접점 방식 키보드


리얼포스 87u 45g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KeyChatter.com 채널


보통 줄여서 무접점 키보드라 부르며 흔히들 키보드계의 끝판왕이라 일컬어진다. 물리적인 접점이 닿아야 입력 신호가 생기는 다른 키보드들과 달리 캐퍼시터(축전기)의 축전량 변화를 측정하여 키 입력을 감지하는 구조이다. 멤브레인도, 기계식도 아닌 제 3의 키감을 보여주며 많이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초콜릿을 부러뜨리는 느낌'이 난다. 굳이 비교하자면 기계식보다는 멤브레인에 가까운데, 이는 구조상 러버돔이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음의 경우에는 기계식보다는 조용하나 멤브레인보다는 시끄럽다. 보통 도각도각, 혹은 포각포각이라고 표현한다.


이 무접점 스위치의 제조사는 거의 두 회사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나는 일본의 토프레,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중국의 노뿌이다. 일반적으로 오리지널인 토프레의 스위치가 훨씬 고오급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2~30만원을 호가하는 고오급 무접점 키보드에 들어간다. 노뿌는 애초에 후발주자이기도 하고 아직까지는 토프레의 그 느낌을 완벽히 따라잡지 못해 저가형 무접점 키보드에 사용된다. 물론 무접점 키보드 자체가 비싸기 때문에 저가형이래봐야 10만원을 호가하는 건 함정. 


장점 단연 특유의 키감이 무접점 방식 최대의 장점이다. 기계식 키보드로 키보드에 입문한 사람들이 결국은 무접점 키보드에 안착하는 경우가 흔하며 그만큼 쫄깃한 감각이 있다. 


단점 일단 비싸다. 앞서 말했듯 저가형 모델이 10~15만원을 넘나들며 고급형 제품군은 20~40만원이다. 게다가 특유의 키감이 의외로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에 '좀 비싼 멤브레인 같다', '내 손엔 안 맞는다'며 구매를 후회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시장 자체가 협소하기 때문에 제조사도 별로 없고,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의 폭이 넓지 않다는 것도 단점이다. 특히 요즘 게이밍 기어 시장의 대세인 화려한 LED는 기대하지 말자.


추천 무접점 키보드 자체가 많이 없기 때문에 사실 추천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돈이 많다면 망설이지 말고 토프레 스위치의 리얼포스와 해피해킹으로 가자. 일반적인 용도라면 리얼포스, 변태적인 키 배열도 상관 없다면 해피해킹이 정석이다. 역시 토프레 스위치를 쓰는 국내 기업 레오폴드 사의 무접점 라인업 FC660C와 FC980C도 호평이 자자하니 생각해 보자. 그만큼 돈을 쓰기 아깝다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한성의 무접점 키보드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앱코 키보드는 마감이 썩 좋지 못하다는 평이 많고 쿨러마스터 노바터치는 개인적으로는 권하지 않는다. 분명 좋은 키보드이나 가격에 비해 영 어중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6. 기타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 멤브레인 스위치와 기계식 스프링이 동시에 들어가는 구조의 키보드이다. 키를 누르면 스프링이 압축되다가 옆으로 휘어지면서(!!) 공이치기가 멤브레인 스위치를 가격, 입력 신호가 발생하는 방식이다. 멤브레인 스위치를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멤브레인 키보드가 맞겠으나 그 키감이나 구조가 독특하기 때문에 보통 버클링 스프링 키보드, 혹은 좌굴식 키보드라고 따로 구분한다.


키감 자체는 기계식, 특히 청축과 그나마 비슷한 편이며 키를 누를 때마다 철-컹, 철-컹 하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소음이 많이 발생하는 방식이다. 러버돔이 아니라 스프링을 사용하기 때문에 수명이 길며 내구성 역시 뛰어나다. 이 방식의 키보드는 역시 IBM 사의 모델 M 키보드가 가장 유명하다. 현재는 유니컴프에서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다.


레이저 키보드 특수한 프로젝터로 평평한 바닥에 키보드 모양을 그려낸 다음 그걸 누르면 손가락의 움직임을 읽어서 임력으로 변환하는 키보드이다. 핵심은 손가락의 움직임을 읽는 센서이며 바닥에 키보드 모양을 그리는 레이저가 특수하다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장점으로는 가격이 30달러 정도로 생각보다 저렴하고 굉장히 미래적인 간지가 난다는 점이 있겠다. 하지만 아직은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 물리적인 키보드를 대체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사실상 맨 바닥을 누르는 것이기 때문에 키감이라는 것도 없고 당연히 센서가 물리적인 스위치만큼 정확하지도 못해 오타나 입력 오류가 있다. 일단은 이런 게 있다는 것만 알아 두자.


터치스크린 키보드 말 그대로 전용 터치스크린에 키보드를 띄운 뒤 입력을 감지하는 방식이다. 과거 SKY의 슬라이드폰 매직키패드에 채용되었던 적이 있으며 현재는 스마트폰이나 타블렛 등에 응용되어 전용 스크린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과 같은 화면을 공유하도록 하는 소프트웨어 키보드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물리적인 키보드에 터치스크린 키보드를 융합해 입력의 다양성을 꾀하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 왔으며, 2016년 애플이 맥북 프로의 키보드에 터치 바를 삽입하며 또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키보드의 여러 가지 배열을 알아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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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길라잡이 2편
2017. 9. 18. 16:58 - 북북서


KBC 포커 2 적축 타건 영상. 출처 유투브 Rhinofeed 채널.

작동방식으로 분류하기(계속)

4. 기계식 키보드

레오폴드 FC750R 갈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Jayin Lee 채널.


드디어 기계식 키보드 차례다. 현재 키보드 문화의 메인스트림이자 가장 핫한 방식의 키보드다. 고오급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데 사실 이는 최근 들어 진행된 고급화의 결과로, 멤브레인 키보드가 발명되기 전에는 기계식 키보드가 일반적으로 흔하게 쓰이는 키보드였다. 값싸고 조용한 멤브레인 키보드가 보급되자 한동안 자취를 감췄으나, 2000년대가 넘어가면서 특유의 키감을 잊지 못한 마니아층이 형성되었고 멤브레인과 차별화를 위해 고급화가 진행, 마침 폭발적으로 커지는 게임 산업과 맞물려 성장한 게이밍 기어 시장을 장악한 것이 지금의 기계식 키보드다. 


처음으로 기계식 키보드를 접한 이들이 가장 놀라는 부분은 바로 무게다. 기계식 부품들이 들어갈 뿐더러 스위치를 고정하기 위한 보강판이 썡 금속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들어보면 상당히 묵직하다. 또한 멤브레인보다 키압이 낮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입력 키압 자체는 기계식 키보드가 더 높다. 기계식 키보드는 스프링을 사용하는 구조 상 누를수록 압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시작 키압이 가벼우며 거기에 경쾌한 소리와 촉감이 있기 때문에 더 가볍게 눌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보는 쪽이 맞다.


장점 키감은 분명 개인차의 영역이지만 기계식 키보드가 멤브레인 키보드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키감이 좋다고 느껴질 여지가 많다. 또한 물이나 각종 오염 물질에서만 보호해 준다면 거의 반영구적인 수명을 자랑한다.


단점 비싸다. 좋은 키보드를 구하려면 10만원 이상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소음이 상당하다는 점도 단점인데, 아무리 조용한 기계식 키보드라도 멤브레인만큼 정숙하지는 못하며 이는 사용 장소에 약간의 제약이 있음을 뜻한다.


메커니즘을 보자면 스프링과 기계식 스위치를 그 핵심으로 한다. 같은 기판의 같은 모델이어도 이 스위치(축)의 종류에 따라 그 키감과 장단점이 확연히 나뉘기 때문에 대충 무슨 축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좋다. 색깔+축을 붙여 부르며, 일반적으로는 독일의 체리 사가 만든 구분을 따른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네가지 축은 다음과 같다.


청축 


덱 프랑슘 청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GSX-S1000F SUZUKI 채널. 


클릭(Click)이라고도 한다. 슬라이더가 파란 색이라 청축이다.가장 일반적인 축이자 가장 기계식 키보드다운 축이다. 높고 경쾌한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손끝에 살짝 걸리는 느낌을 준다. 이 손끝에 살짝 걸리는 느낌 덕분에 입력이 되고 안 되고의 구분이 확실하며, 키가 확실히 눌렸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격투게임이나 리듬게임같은 장르의 게이머들이 즐겨 찾는다. 기본이 되는 체리 사의 청축은 정갈하고 맑은 느낌인 반면 오테뮤 사의 청축은 보다 찰지고 거친 소리가 난다. 


추천 묻지마 A/S와 기괴할 정도로 친절한 사후지원으로 유명한 덱 사의 헤슘과 프랑슘이 체리 청축의 정석이라고 할 만 하다. 가성비를 찾는다면 5만원대에서 체리 청축을 써볼 수 있는 한성의 GTune MCF7도 좋겠다. 보통 체리 축 키보드들이 10만원을 우습게 넘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혜자다.



갈축


레오폴드 FC750R 갈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Jayin Lee 채널.


넌클릭(Non-click)이라고도 한다. 슬라이더가 갈색이라 갈축이다. 청축과 비슷하지만 청축보다 부드러운 키감을 가지고 있으며 크게 찰칵거리는 대신 작고 조용한 구분감을 준다. 입력 키압 자체도 청축에 비해 낮아 장시간 타이핑시 손에 무리가 덜하다.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손맛은 원하지만 청축의 요란한 소음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추천 레오폴드 사의 FC900R과 FC750R, 미니 배열도 괜찮다면 FC660M이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키캡의 각인이 잘 지워진다는 문제점이 있었으나 최근 개선판이 발매되며 완전체가 되었다. 키캡이 ABS이긴 하나 역시 갈축계의 클래식이자 스테디셀러인 필코 사의 마제스터치 역시 유명하다.


흑축


매직포스 68 흑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Stabilized 채널.


리니어(Linear)라고도 한다. 슬라이더가 검은 색이라 흑축이다. 청축과 갈축과는 달리 중간에 구분감을 주는 부품이 없다. 따라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으며 눌렀을 때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없이 바닥까지 쭉 내려간다. 하지만 그만큼 강한 스프링을 쓰기 때문에 반발력이 강하며, 키압 자체도 다른 축들에 비해 높아 장시간 타이핑 시 손에 부담이 비교적 크다. 하지만 이 특유의 쫀득한 키감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고 전해지는 등 어느정도 마니아층이 있는 축이기도 하다.


추천 레오폴드 사의 흑축이 무난하다. FC750R과 FC900R, 미니 배열도 괜찮다면 FC660M. 다만 레오폴드의 흑축은 타 제조사의 흑축보다 조금 키압이 낮은 경향이 있다고들 하니 참고하자. 덱과 바밀로의 흑축 라인업도 평가가 좋다. 



적축



역시 리니어(Linear)라고도 한다. 슬라이더가 빨간색이라 적축이다. 흑축에서 파생되어 나온 축이며, 기본적인 구조는 흑축과 동일하지만 흑축보다 약한 스프링을 써서 키압을 굉장히 많이 낮춘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인 기계식 키보드 중에 가장 키압이 낮다고 알려져 있으며, 키압이 낮으니 키 입력까지 걸리는 시간도 가장 적어 빠른 입력이 중요한 게이머들에게 인기가 많다. 하지만 너무 가벼운 키압 때문에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기만 해도 입력이 되어버려 플래시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주의. 참고로 오테뮤 사의 적축은 체리 사의 적축보다 키압이 무겁다. 


추천 주로 게이머들에게 어필하는 축이니만큼 커세어 사의 K70을 위시한 적축 라인업이 유명하다. 다만 보다 저렴한 구매를 위한 배송 대행을 회사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해외 직구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알아둘 것.



다음 편에서 계속. 키보드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정전용량 무접점 키보드와 기타 다른 키보드를 다룰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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