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홀덤>, 원사운드. 디스이즈게임 연재.
9월 14일, <텍사스 홀덤>이 25화로 완결되었다. 일주일이 넘게 지난 지금에서야 알았다. 내가 무관심했던 탓이지만 원사운드 특유의 악랄한 연재 주기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텍사스 홀덤>은 2012년 3월 27일 첫 화가 올라왔었다. 2017년 9월 14일까지는 5년하고도 반 정도의 시간이다. 일수로 따지면 약 1998일 정도가 나온다. 1998일에 25화다. 누구도 다음 화가 언제 올라올지 알지 못하는 만화였다. 그리고 정말로 다음화가 올라오면 그때까지의 줄거리와 감정선을 되살리기 위해 1화부터 다시 읽어봐야 했다. 대체 그런 불친절한 만화를 왜 보냐고? 그러게 말이다. <텍사스 홀덤>이 정말 재미있지만 않았다면 나도 진작에 때려쳤을 거다.
<텍사스 홀덤>은 동명의 포커 룰을 소재로 한 만화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던 주인공이 전업으로 포커를 치는 갬블러 팀에 스카웃되어 APPT 세부 토너먼트에 나가게 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카이지나 도박마 등지에서 나오는 화려하고 잔혹한 도박을 생각하면 안 된다. <텍사스 홀덤>은 실제 프로 포커 플레이어를 본뜬 캐릭터들을 다수 등장시키고(나노노코나 임영선은 물론 베르트랑과 홍진호까지 나온다!) 유명한 게임 진행을 오마주하는 등 최대한 현실적인 포커를 묘사하려고 노력한다. 포커를 하나도 모른다고? 그래도 전혀 상관없다. 어느 게 높은 카드인지, 블라인드가 뭐고 리버 카드가 뭔지 하나도 모른대도 대충 어떤 형태로 돌아가는 게임인지 정도만 알면 충분하다. 일본 장기를 몰라도 <3월의 라이온>이 재미있고 농구를 몰라도 <슬램덩크>가 찌릿찌릿 하듯이 말이다.
<텍사스 홀덤>, 원사운드. 디스이즈게임 연재.
그리고 무엇보다 빛을 발하는 것은 원사운드의 스토리텔링이다. 만화가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그림을 잘 그리는 타입과 이야기를 잘 하는 타입이다. 원사운드는 여실히 후자다. 미니멀하고 동글동글한 작화를 살린 개그 만화로 유명하지만 그의 진가는 항상 병맛의 탈 아래 숨겨진 서늘한 통찰이었다. <텍사스 홀덤>에서 그는 그간 자제해왔던 진지함을 마음껏 풀어놓는다. 주인공 기수는 프로게이머가 된 것에 후회를 안고 사는 인물이다. 남들처럼 공부하고 대학도 나오고,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늘 가슴 한켠에 미련을 가지고 있다. 기수 뿐만이 아니다. 그가 포커에 입문하게 되며 만나는 모든 이들 역시 각자 자신만의 행복과 불행이 있다. 이는 <텍사스 홀덤>이 단순한 도박 만화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텍사스 홀덤>에서 포커는 결국 삶의 은유이다. 포커는 운에 의지하는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어느 카드를 손에 쥘지 결정할 수 없고 어느 카드가 바닥에 깔리게 될 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카드가 나눠지고 난 뒤 어떻게 할 것인지는 오롯이 우리의 결정이다. 좋은 카드가 오지 않은 불운을 저주할 것인가, 쥔 카드를 가지고 싸워 볼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답은 없다. 있는 것은 우리의 판단과 그 판단을 쫓아갈 용기 뿐이다.
<텍사스 홀덤>, 원사운드. 디스이즈게임 연재.
하지만 역시 25화라는 숫자는 조금 짧게 느껴진다. 조금 더 시간과 분량을 들여 자세하게 풀어 갔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후반부 급전개와 이어지는 결말이 특히 그렇다. 다소 급하게 나열된 느낌이 강하며 몇몇 캐릭터, 특히 영선은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무려 1998일에 걸쳐 연재된 만화인 것이다. 특히 21화와 22화 사이에는 1년하고도 4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1년하고도 4개월 동안 멈춰 있던 만화가 이렇게 멋지게 완결되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정상적으로 연재가 진행되었다면 조금 더 균질하고 만듦새가 좋은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성취는 성취다. 다만 그래도 역시 원사운드의 다음 장편은 주기적인 연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 만화만큼 재미있질 말던가. 보고싶은데 보지 못하는 고통은 <텍사스 홀덤>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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