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se7en)>, 데이빗 핀쳐. 사진 출처 IMDB.
잊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내게는 <세븐>이 그렇다.
이 영화를 처음 끝까지 본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금요일 밤이었고, 그 당시의 나는 주말이면 친한 형네 기숙사 방에 죽치고 앉아 같이 위닝을 하는 것이 일과였다. 밤이 되면 배가 고팠고, 싸구려 태국 음식을 시켜놓고 나면 먹으면서 볼 게 필요했다. 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들이 가득한 외장 하드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 많은 영화들을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받은 건지, 다 보기는 하는 건지 항상 미스터리였다. 그날 우리는 거기서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틀었다. 그게 <세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세븐>을 분류하자면 범죄 스릴러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영화에 장르적 쾌감 같은 건 희박하다. <세븐>은 묵시록이다. 그것도 참혹하고 밀폐된 종류의 것이다. 배경이 되는 도시는 영화 내내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인간 사회 전체의 대유로서 의도된 것이다. 살인마 존 도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존 도우라는 신원미상의 가칭으로 불릴 뿐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에게는 지문도 없다. 그는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개념이나 상징에 더 가깝다. 조커나 안톤 쉬거의 원형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는 죄인을 단죄하는 자인 동시에 그 자체로 거대한, 그리고 중립적인 악이다. 중반부 밀스 형사와 그의 아내는 이런 끔찍한 세상, 즉 존 도우가 존재하는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고민한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면 그들의 고민은 그저 한없는 오만에 불과하다. 아이를 낳아도 되냐니, 이런 세상에서 아이는 태어나지도 못한다.
<세븐(se7en)>, 출처 유투브 Movieclips 채널. 젊은 케빈 스페이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븐>의 놀라운 세련됨이다. 개봉한 지 이미 20년이 넘게 지난 영화고, 블리치 바이패스를 통해 화면을 의도적으로 거칠게 연출했음에도 전혀 올드하다는 느낌이 없다. 등장하는 물건들, 가령 자동차 모델이나 타자기에 약간의 시대적 보정만 가한다면 2017년에 찍은 영화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아마도 헐리웃의 유명한 스타일리스트인 데이빗 핀쳐와 어두운 화면을 누구보다 잘 구현한다는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의 역할이 컸을 거다. 여기에 영화 내내 쏟아지는 빗줄기를 비롯해 음침하고 폐쇄적인 비주얼이 결합되니 쉽게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 묘한 색감의 비주얼이 완성된다.
그리고 나서는 그 유명한 결말이 있다. <세븐>이 가진 놀라운 힘의 절반 이상은 이 결말이다. 상자가 열리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를 깨달은 순간의 끔찍함, 그리고 끝내 방아쇠를 당긴 브래드 피트의 울부짖음. 흔히들 반전 영화라고도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반전은 아니다. 다만 쉽게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이며(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좀 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쌓아올린 여러 가닥의 주제를 완벽하게 완결시키는 마무리이다. 사실 이 결말에도 여러가지 버전이 있었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상자에 개의 머리가 들어있는 버전, 서머셋이 존 도우를 쏘아 죽이는 버전, 그리고 지금의 버전 이렇게 세 가지라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결말이 제일 나은 것 같다. 개의 머리가 들어있는 건 지나친 하위호환이며 서머셋이 존 도우를 쏘아 죽이는 건 너무 구원적이다. 기독교적 텍스트를 대입하자면 서머셋은 선하지만 무력한 천사이지 직접 악을 처단하고 데이비드 밀스, 즉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세븐(se7en)>, 데이빗 핀쳐. 사진 출처 IMDB.
결국 <세븐>은 지독한 악에 관한 영화이며 그 악에 맞닥뜨린 인간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언급되는 죄악은 7가지이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7가지 대죄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희생자가 8명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숨겨진 여덟 번째 죄악의 단죄가 행해졌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 그 여덟 번째의 죄는 다름아닌 무관심이다.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다른 영화같으면 몇 번 돌려보며 놓친 장면들을 찾아볼 텐데, <세븐>은 그럴 엄두가 안 난다. 다시 그 깊고 숨막히는 이야기로 들어갔다간 또 며칠간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다.
<세븐(Se7en)>
추천
스릴러의 원형이자 고전을 보고 싶으신 분
밀도있는 이야기가 보고 싶으신 분
정신적 고통을 즐기시는 분
비추천
끔찍하거나 잔인한 것을 견디기 힘든 분
꿈도 희망도 없는 영화는 싫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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