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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믹 블론드(2017)
2017. 9. 7. 00:16 - 북북서


<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 2017, 데이빗 레이치

사진출처 다음영화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베를린, 영국 첩보원 제임스 가스코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영국 정부는 비상이 걸린다. 그에게는 전 세계 모든 스파이의 정체가 기록된 비밀스러운 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슈퍼 스파이 로레인 브로튼은 이 리스트를 회수하라는 임무를 받지만 이 리스트를 노리는 것은 (당연히) 그녀만이 아니다. 소련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 역시 저마다 꿍꿍이가 있으며, 그녀를 도와줘야 할 베를린 담담 요원 데이빗 퍼시벌조차 어딘가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 게다가 등장인물 중 한 명은 소련의 이중 첩자 짓을 하고 있단다. 도대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로레인은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리스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여러가지가 생각나는 영화다. 스토리는 존 르 카레의 소설 같고 화면의 질감은 <존 윅> 시리즈의 그것을 닮았다. 액션의 설계나 동선은 자연히 <제이슨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며 주인공 로레인 브로튼의 캐릭터는 고전 슈퍼 스파이들이 으레 그렇듯 제임스 본드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심지어 주인공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전형적인 본드걸이 등장하기까지 한다(미묘한 부분이긴 하다. 이왕 샤를리즈 테론이 원톱으로 활약하는 영화인데 수동적인 본드보이(...)가 등장해도 신선하고 좋지 않았을까). 


이 영화의 장점은 뚜렷하다. 단언컨대 <아토믹 블론드>는 올해 최고의 액션 영화 중 하나다. 약간 리버브가 걸린 듯한 타격감도 멋지고. 치고 받는 고통이 관객들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한 필사적인 액션도 멋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집행하는 샤를리즈 테론이 너무 멋지다. 중반부 총에 맞은 동료 스파이를 보호하며 펼치는 7분간의 롱테이크 계단 격투신이 특히 압권인데,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영화에서 샤를리즈 테론은 소위 여전사나 미녀 스파이 같은 전형성을 전혀 배제한 채로도 주먹 하나, 발길질 하나에 굉장한 설득력을 부여해낸다.


두번째 장점은 영화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이다.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에 형광빛 네온 색감, 특히 제목 그대로 주인공의 머리 색깔(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는 플래티넘 블론드(Platinum blonde)라고도 불리며 하얀 백금발을 뜻한다)로 화면에 포인트를 주고 있는데 이게 또 굉장히 클래식한 힙함이 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내내 특유의 베이스를 앞세운 80년대 음악들이 신나게 흘러나온다. 약간 냅다 틀어댄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80년대 음악을 좋아한다면 매력적인 경험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 사진출처 imdb


하지만 <아토믹 블론드>는 그 단점 역시 굉장히 분명한 영화다. 뒤로 갈수록 붕 뜨는 플롯이 바로 그것이다. 플롯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 존 르 카레 소설의 그것을 닮은 음모와 배신의 플롯은 영화가 끝난 뒤 곱씹어보면 상당히 잘 짜여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의외로 결말의 복선 또한 충실히 심어져 있다(스파이글래스의 대사를 주의깊게 보자). 하지만 정교한 플롯은 당연히 그것을 잘 관객들에게 전달해 줄 좋은 스토리텔링이 필요하고... 아쉽게도 <아토믹 블론드>는 그런 부분에서 그리 섬세하지 못하다. 특히 빠른 전개가 이어지는 후반부에 이르면 캐릭터와 플롯이 잘 붙지 않는 느낌이 강하게 들며, 급기야는 거기까지 그런대로 열심히 끌어온 이야기가 너무나 기계적으로 결말만 탁탁탁 제시하고 끝나 버린다. 굉장히 아쉬운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완벽한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약간의 넘겨짚기가 허용된다면, 결국 <아토믹 블론드>는 제작 단계부터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영화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였던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이미지란 바로 센서블한 80년대 음악을 배경으로 샤를리즈 테론이 네온빛 가득한 베를린을 누비며 적들을 후려패는 모습이리라. 단순히 그 이미지를 충실하게 재현했는가만을 따져본다면,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다른 요소는 부수적이라 판단했다면 <아토믹 블론드>는 더없는 성공이다. 


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 사진출처 imdb


추천
샤를리즈 테론이 신나고 멋있게 남자들을 후려갈기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분
80년대 음악과 분위기를 좋아하시는 분
제대로 된 액션이 보고 싶으신 분

비추천
진지하고 교묘한 냉전 스릴러를 좋아하시는 분
80년대 음악을 싫어하시는 분
깔끔하게 끝나는 영화가 좋으신 분


덧. 그다지 많이 잔인하다 할 만한 부분은 없으나 수위가 상당한 베드신이 있으므로 마음의 준비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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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 종의 전쟁>, 맷 리브스, 2017

사진출처 다음영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사실 조금 뜬금없는 영화였다. 때는 2011년도, <블랙 스완>이 상반기를 장악하고 하늘엔 아이언맨과 토르가 날아다니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개막을 알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꼬질꼬질한 원숭이가 한 마리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무려 38년이나 전에 끝났던 시리즈의 부활을 선언하며 말이다!(팀 버튼의 2001년도 <혹성탈출>은 영화 프랜차이즈라기보다는 원작 소설의 재 영화화에 가까우니 제외하도록 하자) 한때 덕후들 꽤나 거느리던 시리즈였다고는 하지만 왜 굳이 이제와서? 게다가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의 어감은 요즘 시대 기준으로는 어떤 B급 SF의 바이브까지 풍기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게 상당히 재밌었던 거다. 고작 한 마리 원숭이라고 생각했던 시저가 마지막에는 거의 피흘리는 스파르타쿠스처럼 보였다. B급 SF는 커녕 생각외로 너무 장엄하고 애틋하고, 얼핏 직선적인 스토리를 팽팽하게 몰아대는 힘이 마치 스필버그 영화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CG로 그려낸 유인원들은 대부분의 인간 배우들보다도 자연스러우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심지어 3년 뒤인 2014년 개봉한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은 더욱 훌륭했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혹성탈출> 시리즈의 유인원들은 인간의 안티테제임과 동시에 인간 사회의 은유로서 기능한다. 인간과 함께 비춰질 때는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다운 주체로서 소위 "인간성"(와, 인간탈트)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유인원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한 이후부터는 인간 사회의 갈등과 문제점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기도 한 것이다.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에서 유인원의 리더가 된 시저와, 그의 아픈 고뇌에도 불구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다층적이다. 조금 오버하자면 거의 그리스 비극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혹성탈출 : 종의 전쟁>, 사진출처 imdb


그리고 그 주제와 이야기를 이어받아 이 트릴로지를 마무리하는 것이 바로 이번 <혹성탈출 : 종의 전쟁>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시저와 그의 유인원 무리는 상당히 암울한 지경에 처해 있다. 군인들은 계속해서 유인원들을 공격하며 사상자와 배신자가 넘실거린다. 시저는 코바 사건 이후 굳건하던 멘탈이 다소 불안정해졌고 군인들을 이끄는 "대령"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상황에 가족과 인간의 여자아이, 그리고 인간 측 사정이 얽히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스파르타쿠스>였다. <혹성탈출 : 종의 전쟁>은 영화 중간에 아예 "Ape-calypse Now"라 휘갈겨 쓰인 그래피티가 등장하기까지 하는 만큼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기독교적 메시아인 시저를 탄압하는 맥컬러 대령은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의 레퍼런스임이 거의 분명해 보이는데, 플롯에 있어 그의 역할이나 최후를 맞는 방식이 특히 그렇다. 


그리고 이 맥컬러 대령(사실 이름은 군복에만 써 있고 영화 내내 그냥 "대령(The Colonel)"이라고만 불린다) 이야말로 시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써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이다. 그는 커츠 대령이고 모세를 탄압하는 파라오이며 동시에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론에서 시저와 대조를 이루는 안타고니스트다. 각자 한 집단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두 캐릭터가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마지막에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된 뒤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전개는 아이러니하며 그만큼 멋지다. 새로운 <혹성탈출> 시리즈가 좋은 이유는 이처럼 한 영화에 여러 가지 층위가 쌓여 있다는 점인데, 이는 보다 접근을 가능케 하며 보고난 후가 보는 순간만큼 재밌는 영화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텐션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나쁜 원숭이(Bad Ape)나 상징하는 바가 명확한 암살자(...) 노바 역시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소모되지 않으며 이야기에 양감을 부여한다.


<혹성탈출 : 종의 전쟁>, 사진출처 imdb


이야기를 묵직하게 밀고 나가는 시리즈 특유의 힘은 여전히 건재하다. 시저를 모션 캡쳐한 앤디 서키스를 필두로 한 배우들의 연기 역시 흠잡을 곳이 없어 화면 내내 고요한 듯 팽팽한 에너지가 가득하다. 다만 <혹성탈출 : 종의 전쟁>은 아쉽게도 그 만듦새에 있어서는 앞의 두편보다 조금 약한 편이다. 감정선이 충분히 쌓이기 전에 다소 급하게 이어붙여진 장면들이 보이며(루카와 노바의 벚꽃 신이 대표적이다) 결말부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 역시 성서와 모세의 은유인 점을 고려하더라도 조금 지나치게 편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종의 전쟁(원제로는 War)"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면서도 중후반부 유인원들의 목적은 전쟁이 아닌 탈출과 생존인 점도 미묘한 부분이다. 조금 더 스케일이 큰 무언가를 기대했던 관객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진화의 시작>에서 발단하고 <반격의 서막>에서 위기에 다다른 시저의 여정은 <종의 전쟁>에서 절정과 결말을 맞는다. 무수한 희생과 고뇌를 이어붙여 다다른 마무리이다. 그래서 그 끝은 어땠느냐 하면, 나무랄 데 없는 것 같다. 물론 참신한 반전은 없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끝까지 애매한 기교나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정공법이고, 견실하다. 어떻게 이 난데없이 튀어나온 시리즈가 이렇게 우직할 수 있었을까. 38년 전에 완결되었던 영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리즈를 다시 만드는데 불안하진 않았을까? 그만큼 자신들이 가진 소재에 확신이 있었던 걸까. 난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로써 새로운 <혹성탈출> 트릴로지는 21세기 가장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다. 시리즈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나오면 두근거리며 챙겨봐야 할 또 하나의 프랜차이즈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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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벨 : 인형의 주인>, 2017, 데이빗 F 샌드버그

사진출처 다음영화


<컨져링> 시리즈의 애나벨 인형은 진짜 진짜 너무 무섭게 생겼다. 영화 설정상으론 애들 인형이던데 아니 세상에 대체 누가 애들 장난감에 저런 흉칙한 얼굴을 달아놓는가 말이다. 잠든 딸 이불이라도 덮어주려 방에 들어갔는데 어둠 속에 저렇게 생긴 게 우두커니 앉아 있어 봐라. 최소 비명이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심장마비다. 영화 소품이었기에 망정이지 진짜로 저런 게 만들어져서 팔렸다면 엄마 아빠 여럿 실려갔을 게 분명하다(이 시리즈의 모티브인 실제 애나벨 인형은 그냥 귀엽게 생긴 봉제인형이다).


그리고 이 애나벨 인형을 가지고 제작된 영화 <애나벨>은 2014년 당시 전 세계에서 제작비의 10배 가까이를 벌어들인 흥행작이 되었다. 대히트를 친 <컨저링>의 모멘텀이 이어지고 있었던 데다 상기한 애나벨 인형의 크리피함까지 더해지니 스핀오프로서는 유리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완성도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다소 미묘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가 없었다. 몇몇 시퀀스는 분명 상당히 무서웠지만 대신 그것들을 엮어내는 이야기는 자주 어수선해졌다. 여주인공을 위시한 배우들의 연기 또한 썩 훌륭하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으며, 서스펜스를 쌓는 기법이나 호러 장치의 참신함이 <컨저링>의 그것에 비하면 신선하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였을까. <애나벨 : 인형의 주인>은 다시 본격적인 하우스 호러로 회귀하였다. 거대한 집이 있고 귀신들린 인형이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되는데, 이들은 당연히 하지 말란 짓을 하고 들어가지 말란 곳을 들어가며 귀신들에게 온갖 빌미를 다 제공한다. 쇼에 쓰일 배경과 인물, 장치가 소개되는 전반부가 지나가고, 음침한 밤이 되면 애나벨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부지런하게도 첫날 밤부터 바로 말이다. 


무서운가 하면, 무섭다. 제임스 완과 데이빗 F 샌드버그(포스터에 나와있듯 <라이트 아웃>의 감독이다. <애나벨>의 감독은 <인시디어스>시리즈와 <컨저링>의 촬영감독이었던 존 R 레너티가 맡았다)는 하우스 호러의 어떤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장르 성격상 처음 보는, 완벽히 신선한 트릭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퀀스마다 약간의 트위스트를 섞어 놓았고, 거기에 저 인형이 더해지니 많이 무섭다. <컨저링>의 지하실 박수 시퀀스를 생각해 보자. 닫히는 문, 어둠, 그리고 자꾸 꺼지는 불빛. 뻔한 전개임에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지 않던가. 또한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애나벨 인형 측 악령 역시 역대 <컨저링> 시리즈 중 가장 강하다. 십자가나 성경에도 딱히 영향을 받는 것 같지는 않으며 직접적인 살인이나 물리력의 행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컨저링 2>의 수녀 귀신 역시 강하긴 했으나 이쪽은 자신의 이름과 약점을 미리 알려주는 친절함(...)역시 겸비하고 있었기에 제외한다. 


스토리는 평이하다. 보고 난 뒤 생각해보면 역시 전형적인 스토리인데, 막상 영화를 보는 동안엔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는 느낌이다. 사실 여기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미스터리를 짜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사실 애나벨 인형은 착한 아이였답니다"식으로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애나벨 인형이 저 흉칙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하지만 역시 군데군데 이야기의 요철이라고 할까, 튀어나온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진행되려면 아이들이 계속 집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개연성이 조금 설득력이 약하다거나 하는 식이다. 아니, 누가 봐도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오, 너희들 힘들었지, 얼른 가서 자렴."하고 다시 방으로 돌려보내는게 가당한가. 그것도 사람이 죽었는데! 딱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설정도 아니고 말이다. 이 정도는 하우스 호러를 성립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중간중간에 나오는 "직접적인" 장면들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일단 <컨저링>이나 <컨저링 2>보다는 잔인한 영화인 만큼(잔혹하게 죽는 피해자들이 나온다) 악령 자체도 상당히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대부분의 시퀀스에서 그 기능에 충실한 편이나, 간혹 서스펜스를 터뜨려줘야 할 부분에서 그 디자인이라던지, 보이스톤이라던지가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조금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이는 <컨저링>시리즈의 서스펜스가 대부분 원패턴인데서 기인하는 점도 있다. <컨저링>, <인시디어스>등의 무서운 장면은 대부분 이상한 일의 발생 -> 낚이는 인물 -> 이상한 일 2(여기서 복선을 회수) -> 소오름 -> 도망가려 하나 실패 -> 갑자기 평화로움 -> 끝인가? -> 쾅 의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작 <애나벨>은 컬트 살인마의 혼이 애나벨에 들어간 것이 애나벨 인형의 기원이라 그렸다. 하지만 제임스 완은 조금 약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애나벨 : 인형의 주인>에서 애나벨 인형의 기원은 다소 스케일이 커졌다. 그리고 이야기는 원을 그리며 다시 <애나벨>과 이어진다. 접합부는 어떤가 하면, 나무랄 데 없는 것 같다. 원제가 Creation인데 그것을 인형의 주인이라 번역한 것이 조금 의아했으나 끝에 가서는 이해하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애나벨 : 인형의 주인>은 애나벨 인형이 아니라 그 주인, 애나벨 히긴스의 영화이다. 원작(...)이라고 해야 하는지, 실제 애나벨 사건에 대한 오마주도 등장하니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난다.


요약하자면, <애나벨 : 인형의 주인>은 썩 잘 만든 호러 영화이다. <컨저링>과 <컨저링 2>의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무서웠다. <컨저링>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좋아할 영화이다. 무서운 영화를 찾는대도 좋아할 영화이다. 영화 평을 캡쳐한 짤이 유행이던데 실제로 뒤에 앉은 분이 자꾸 팝콘을 뿌리시더라.


<애나벨 : 인형의 주인>


추천

여름이고 하니 무서운 게 땡기시는 분

<컨저링>시리즈를 재밌게 보셨던 분

인형이 무서우신 분


비추천

아귀가 딱딱 맞는 호러를 좋아하시는 분

복잡한 미스터리를 좋아하시는 분

무서운 걸 싫어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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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사진출처 다음 책


비가 오던 어느 날 아내가 묻는다. 만약 제가 아주 못생긴 여자였더라도 절 사랑했을 건가요? 남편은 허를 찔렸다. 전축에 올려놨던 폴 데스몬드의 곡이 끝날 때까지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남편은 소설가였다. 소설가는 한 마디 말을 위해 한 권의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렇게 하나의 대답으로서 세상에 나왔다.


일단 로맨스 소설이다. 표지도 예쁘고 밑에는 핑크핑크 귀여운 띠지까지 둘러져 있다. "스무 살, 다시없을 그녀와의 특별한 이야기. 무규칙 이종소설가 박민규의 로맨틱 귀환!"이라는 문구를 보고 있으면 꽤나 달달한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남자 주인공이 있고, 여자 주인공이 있고, 만남이 있고 연애가 있고 시련이 있다. 그러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여타 로맨스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이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은 정말, 정말, 정말로 못생긴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늘 시청하는 토요일의 쇼프로에서... 즉 정해진 공식처럼 아이돌과, 발라드 가수가 출연하는 무대를 보고 있는데... 카레를 먹으며 보고 있는데... 방청객들의 박수소리도 여전한데... 한결같은 MC에 늘 보던 무대인데... 어떤 예고도 없었는데... 느닷없이 요들송을 부르는 아저씨가 나와


요로레이리요 레이리요 레이요르리


하는 기분이었다. 뭐, 뭐야... 카레가 식을 때까지 망연자실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그때까지도 꽤 많은 못생긴 여자들을 봐왔지만 나는 그녀처럼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세기를 대표하는 미녀를 볼 때와 하나 차이 없이,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에게도 남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상상이 가는가? 난 모르겠다.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가 대체 어떤 얼굴인지, 나로써는 알 길이 없다. 작가 역시 그녀의 생김새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를 피한다. 코는 어떻고 눈은 어떻고, 하는 언급을 일절 하지 않는다. 즉 이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은 우리가 평생 본 적 없는 정도의, 정말로 못생긴 여자인 것이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언뜻 비현실적인 전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작가의 말마따나, 인류는 단 한 번도 못생긴 여자를 사랑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못생긴 이를 사랑하는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은 미인에 관대하며 미인이 아닌 이들에겐 악의적이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부러워한다. 스스로의 아름답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남의 아름답지 못함은 멸시한다.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식의 정신승리는 공허하다. 끝없이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며 아름다워지려 애쓰는 악순환에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동참해왔다. 누군가는 이를 소위 발전이 아니냐 하겠지만 글쎄, 아름다움이 어떤 계급적 권력마저 닮아가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조금 더, 조금 더 아름다워지려고 점점 높아져만 가는 기준을 뒤쫓으려 끝없이 자신을 몰아세우다가 도달하게 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두 축으로 하여 굴러가는 끝없는 경쟁은 비단 외모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 박민규는 전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늘 이상을 쫓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경쟁사회의 피폐함을 조명해낸다.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예쁜가? 그렇게 예뻐질 자신이... 있는 걸까? 누군가의 학력을 무시하는 순간, 무시한 자의 자녀에게도 더 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세상이 주어진다. 아 그렇겠지... 당신을 닮아, 당신의 아들딸도 공부가 즐겁겠지 나는 생각했었다. 사는게 별건가 하는 순간 삶은 사라지는 것이고, 다들 이렇게 살잖아 하는 순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세상이 펼쳐진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한다. 잘 좀 살아, 피리를 불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스타를 내세운다. 좀 예뻐져 봐, 피리를 불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피리를 불어주세요, 더 멋지게... 피리를 불어주세요, 더 예쁘게... 쫓고 쫓기는 경쟁은 그 뒤에서 시작된다. 서로를 밀고 서로를 짓밟는 경쟁도 그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멜른의 어떤 쥐들도 피리 부는 자를 앞서 뛰진 못했지-


그렇다면 어쩌라고? 현실적인 대안이 있기는 한가? 물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제시하지 못한다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세상 누구에게도 그런 답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의문이 들 때쯤 소설은 다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여자 주인공은 못생겼다. 남자 주인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을 사랑한다. 이 책의 핵심은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다. 이것은 아내의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세세하게 써놓지는 않겠다. 다만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기나긴 연서를 쓰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본질적으로 열렬한 사랑의 예찬이며, 한 장의 기나긴 연서다.


세상에는 예쁘고 멋지고 부러운 것들이 너무나 많다.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보잘것없어보이는 순간도 마찬가지로 부지기수다. 하지만 사랑은 이상한 것이다.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며 철저하게 자기완결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그가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받는 사람은 불을 밝힌 전구와도 같아서, 일단 찬란히 빛나기 시작하면 전구의 생김새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멋진 것들은 언제나 멋질 것이고 예쁜 것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시간이나 어떤 결심 따위가 쉽게 해결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하나같이 불완전한 존재다. 어쩔 수 없이 미인과 부자가 좋으며 어쩔 수 없이 돈과 명예와 경쟁이 가져다주는 모든 달콤함을 추종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가지 더 높은 차원으로 갈 수 있는 권능이 영혼 어딘가에 부여되어 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기대를 걸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포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다. 신의 기대대로 살 순 없다 해도,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동물이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은, 말이다.


부러운 순간도 있을 것이고, 부끄러운 순간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이 더 좋을 때도 올 것이고, 나는 왜 더 아름답지 못할까 자책하는 경험도 피할 수는 없을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한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하멜른의 피리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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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오브 어스, 그 장면
2017. 8. 6. 01:55 - 북북서

<라스트 오브 어스>, 영상출처 GmBashell 유투브


<라스트 오브 어스>의 겨울은 강렬한 챕터였다. 엘리와 조엘의 시점이 교차되며 고조되는 서스펜스는 혹독했고 내내 몰아치는 눈보라는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절정부에 이르러 엘리가 칼을 내리칠 때는 거의 호흡곤란이 일어날 지경이었으며, 마침내 조엘이 엘리를 끌어안으며 아가(Baby girl)이라고 부르는 순간은...


그리고 봄, 그리고 기린. 아, 평화. 안정. 순수. 아, 다시 봐도 혈관에 따뜻한 코코아가 흐르는 느낌이다. 이 기린 시퀀스는 조엘과 엘리로 하여금 겨울에 일어난 일을 넘어서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기점이며, 동시에 그들이 여태껏 겪은 정신적 소모를 치유하는 기능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격렬한 겨울 챕터가 끝나고 그 여운과 탈력감에 지친 플레이어 역시 마찬가지다. 목줄기를 물어뜯으러 오는 클리커에게 시달리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지도 못한 평화와 맞닥뜨리게 되니 그만 꼼짝없이 치유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기린 시퀀스는 게임 스토리텔링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컷신도 아니고 강제적 카메라 고정은 더더욱 아니다. 자연스럽게 기린을 보고 그것이 어떤 상징인지, 어떤 장치인지 인지하기 이전에 빠져들게 한다. 연출부터 음악까지 그야말로 마술적이다. 그러니까 라오어 2좀 빨리 내주세여 너티독 나으리들 100달러라도 사드리리오니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
2017. 8. 5. 18:47 - 북북서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2010, 에드가 라이트

사진출처 IMDB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Scott Pilgrim vs. the World)>는 한국계 캐나다인 만화가 브라이언 리 오말리의 그래픽 노블 <스콧 필그림>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스콧 필그림은 아마추어 락 밴드의 베이시스트다. 그런데 세상에, 어느날 그의 앞에 너무나도 아리따운 "운명의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라모나 플라워스다. 그런데 이럴수가, 그녀와 사귀려면 그녀의 일곱 전남친을 모조리 싸워 물리쳐야 한단다.


눈치채셨는가? 이건 영화의 플롯이 아니다. 이건 게임의 화법이다. 라모나 플라워스는 공주고 일곱 전남친은 차례로 깨나가야 하는 보스들이다. 원작 만화 <스콧 필그림>은 바로 이런 만화다. 게임과 음악으로 대표되는 각종 대중문화의 패러디가 난무하며 미국 코믹스와 일본 망가의 센스가 유쾌하게 뒤섞인, 소위 병맛 문화에도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원작의 이런 성격은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사진출처 IMDB


그래서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는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하다. 각종 그래픽과 나레이션은 8비트의 레트로 감성으로 출력되며 이야기의 전개는 나사가 서너개 쯤 풀려있다. 물리법칙은 자연스럽게 무시되며 그것을 설명하려는 어떤 시도도 (당연히) 하지 않는다. 게임을 위시한 각종 서브컬쳐의 레퍼런스와, 그에 힘입은 컬트적인 코드의 개그를 거의 난사하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느 순간은 그 뻔뻔함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영화의 개그는 꽤 좋다. 마이클 세라 특유의 미묘하게 어색한 연기와도 시너지가 좋고,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센스가 좋다. 이 영화가 노려야 하는 관객층, 즉 "서브컬쳐에  전반에 어느정도 이해도가 있으면서 유치함을 견뎌낼 수 있는" 이들의 취향을 잘 관통하고 있다. 저 얇은 관객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엄청 웃으면서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상기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가 그리 매끄럽게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선 욕심이 조금 지나쳤다. 영화는 유쾌한 긱 무비를 넘어서 아마도 다른 소장르 몇 가지를 포섭하려 했던 듯 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음악 영화이고, 그 다음은 성장물이다. 분명 멋진 시도긴 하다. 성공했더라면 영화의 완성도가 한 단계 높아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물은 실패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한다. 음악 영화로서의 기반은 의외로 나쁘지 않으나 그것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려 줄 좋은 음악이 부족하다. 성장물로서는 더욱 허술한데,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러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발견하는 순간 영화 스스로가 모든 텐션과 긴장을 내팽개쳐버리며 포기해버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도 자체가 영화의 어떤 자기방어였던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일곱 전남친을 모두 싸워 이긴다는 이야기의 골격 자체가 영화라는 매체가 다루어내기는 조금 길고 반복적이다. 만화나 게임에서 보스가 많은 것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게임은 스테이지간 개성만 잘 배분해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만화의 경우는 긴 시간을 들여 공개되는 장르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길어야 2시간 안팎인 이야기에서 일곱 명의 보스를 모두 다루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독 에드가 라이트 역시 이 문제를 자각하고 있었던 듯, 보스마다 전투의 방식과 구도를 달리 하는 등 노력하나 결국 후반부 일본인 쌍둥이 파트에 이르게 되면 누적된 피로감이 상당해진다. 쉽게 말해 물린다는 이야기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는 그 장단점이 명확한 영화다. 노리는 관객층은 한정적이며 만듦새의 측면에서 여러 굵직한 단점을 안고 있다. 2010년 개봉 당시 흥행 성적이 참담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개봉조차 되지 못했다. 현실에 두 발을 디딘 진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재앙과도 같은 영화지만, 대신 취향에만 맞는다면 이처럼 풍성한 종합선물세트도 없을 거다. 가끔은 이렇게 발놀림이 가벼워 날아다닐 것만 같은 영화도 필요한 법이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사진출처 IMDB


추천

레트로 게이밍과 서브컬쳐에 이해도가 있으신 분

유치함을 견딜 수 있으신 분

병맛 코드를 좋아하시는 분


비추천

레트로 게이밍을 모르시는 분

작품성 있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딱 질색이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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