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 2017, 데이빗 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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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베를린, 영국 첩보원 제임스 가스코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영국 정부는 비상이 걸린다. 그에게는 전 세계 모든 스파이의 정체가 기록된 비밀스러운 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슈퍼 스파이 로레인 브로튼은 이 리스트를 회수하라는 임무를 받지만 이 리스트를 노리는 것은 (당연히) 그녀만이 아니다. 소련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 역시 저마다 꿍꿍이가 있으며, 그녀를 도와줘야 할 베를린 담담 요원 데이빗 퍼시벌조차 어딘가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 게다가 등장인물 중 한 명은 소련의 이중 첩자 짓을 하고 있단다. 도대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로레인은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리스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여러가지가 생각나는 영화다. 스토리는 존 르 카레의 소설 같고 화면의 질감은 <존 윅> 시리즈의 그것을 닮았다. 액션의 설계나 동선은 자연히 <제이슨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며 주인공 로레인 브로튼의 캐릭터는 고전 슈퍼 스파이들이 으레 그렇듯 제임스 본드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심지어 주인공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전형적인 본드걸이 등장하기까지 한다(미묘한 부분이긴 하다. 이왕 샤를리즈 테론이 원톱으로 활약하는 영화인데 수동적인 본드보이(...)가 등장해도 신선하고 좋지 않았을까).
이 영화의 장점은 뚜렷하다. 단언컨대 <아토믹 블론드>는 올해 최고의 액션 영화 중 하나다. 약간 리버브가 걸린 듯한 타격감도 멋지고. 치고 받는 고통이 관객들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한 필사적인 액션도 멋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집행하는 샤를리즈 테론이 너무 멋지다. 중반부 총에 맞은 동료 스파이를 보호하며 펼치는 7분간의 롱테이크 계단 격투신이 특히 압권인데,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영화에서 샤를리즈 테론은 소위 여전사나 미녀 스파이 같은 전형성을 전혀 배제한 채로도 주먹 하나, 발길질 하나에 굉장한 설득력을 부여해낸다.
두번째 장점은 영화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이다.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에 형광빛 네온 색감, 특히 제목 그대로 주인공의 머리 색깔(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는 플래티넘 블론드(Platinum blonde)라고도 불리며 하얀 백금발을 뜻한다)로 화면에 포인트를 주고 있는데 이게 또 굉장히 클래식한 힙함이 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내내 특유의 베이스를 앞세운 80년대 음악들이 신나게 흘러나온다. 약간 냅다 틀어댄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80년대 음악을 좋아한다면 매력적인 경험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 사진출처 imdb
하지만 <아토믹 블론드>는 그 단점 역시 굉장히 분명한 영화다. 뒤로 갈수록 붕 뜨는 플롯이 바로 그것이다. 플롯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 존 르 카레 소설의 그것을 닮은 음모와 배신의 플롯은 영화가 끝난 뒤 곱씹어보면 상당히 잘 짜여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의외로 결말의 복선 또한 충실히 심어져 있다(스파이글래스의 대사를 주의깊게 보자). 하지만 정교한 플롯은 당연히 그것을 잘 관객들에게 전달해 줄 좋은 스토리텔링이 필요하고... 아쉽게도 <아토믹 블론드>는 그런 부분에서 그리 섬세하지 못하다. 특히 빠른 전개가 이어지는 후반부에 이르면 캐릭터와 플롯이 잘 붙지 않는 느낌이 강하게 들며, 급기야는 거기까지 그런대로 열심히 끌어온 이야기가 너무나 기계적으로 결말만 탁탁탁 제시하고 끝나 버린다. 굉장히 아쉬운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완벽한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약간의 넘겨짚기가 허용된다면, 결국 <아토믹 블론드>는 제작 단계부터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영화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였던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이미지란 바로 센서블한 80년대 음악을 배경으로 샤를리즈 테론이 네온빛 가득한 베를린을 누비며 적들을 후려패는 모습이리라. 단순히 그 이미지를 충실하게 재현했는가만을 따져본다면,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다른 요소는 부수적이라 판단했다면 <아토믹 블론드>는 더없는 성공이다.
아토믹 블론드(Atomic Blonde)>, 사진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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