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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하자드 2 리메이크 (Resident Evil RE:2)


PS4, XBOX ONE, PC


사진출처 바이오하자드 2 리메이크 공홈


잘 만든 민트초코같은 게임이다.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겠지만 참고 들어주길 바란다. 그래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는 비유니까. 


<바이오하자드 7>은 여러모로 이질적인 게임이었다. 사실적으로 바뀐 캐릭터 디자인, 기존의 세계관에서 거의 완전히 독립된 캐릭터와 스토리, 4편 이후로 확립된 쿼터뷰를 버리고 시리즈 최초로 도입한 1인칭 시점에... 무엇보다도 체술을 포함한 액션 컨텐츠의 대부분을 삭제하고 추구한 호러라는 방향성까지 모두 그랬다. 그 결과는 <바이오하자드>의 스킨을 씌운 <아웃라스트 3>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생경한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다행히도 캡콤의 이 과감한 선택은 성공했다. 4편 이후 최고의 메타크리틱 점수를 받았으며, 손익분기점도 넘겼다. 호러 게임으로서의 근-본을 되짚어나감으로서 시들어가는 <바이오하자드> 프랜차이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찬사가 각종 웹진과 리뷰어들의 주된 평가였다. 적어도 5편이나 6편보다는 뛰어난 게임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이때 판매량의 통계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바이오하자드 5>는 1,200만 장을 넘게 팔아치웠다. 혹평을 받은 <바이오하자드 6> 역시 1,000만장을 넘겼다. 하지만 <바이오하자드 7>는 그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600만 장을 간신히 상회하는 데에 그쳤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답은 바로 장르에 있다. 호러는 게임 시장에서 그리 인기있는 장르가 아니다. 절대다수의 게이머들은 게임에서 정서적 스트레스를 받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종 매체에서 역대 게임들의 판매량을 한 번 찾아보시라. 상위권은 모조리 액션, 스포츠, FPS, 그리고 패밀리 게임의 차지이다. 발매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아웃라스트>의 대성공도 단순 판매량으로 보면 400만 장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시장의 협소함을 알 수 있다(1,500만장이 팔렸다는 루머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2016년 10월 제작사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400만 장이 맞다. 혹시 시리즈 전체 판매량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요컨대 호러는 매니아를 위한 장르라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으로 비유하면 민트맛 아이스크림이다. 아무리 민트 본연의 향이 살아 있어도 먹는 사람만 먹는다. 반면 액션은 초코맛이다. 대충 초콜릿 맛만 난다면 누구나 잘 먹는다. <바이오하자드 7>은 오가닉 민트 아이스크림이었지만 <바이오하자드 5>와 <바이오하자드 6>는 무난한 초코 아이스크림이다. 그 퀄리티와는 별개로 잠재적 구매자의 풀 자체가 달랐던 거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충 눈치채셨는가? 그렇다. <바이오하자드 2 리메이크>(이하 RE:2)는 그 두 가지를 섞었다. 7편의 호러 요소와 그래픽 컨셉은 그대로 유지하되 지난 시리즈의 시점과 액션성을 더했다. 우리는 이른바 민트초코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또다시 의문이 생긴다. 민트초코는 민트인가 초코인가? 붕어빵은 붕어가 아니라 빵이고 토마토파스타는 토마토가 아니라 파스타니까 민트초코는 초코인가? 큐티섹시 트와이스 사나는 큐티인가 섹시인가? 이 모든 고민에 해답은 있는가?


<RE:2>는 일단 여전히 호러의 테이스트를 간직하고 있다. 체술은 없고 구르기나 회피도 없다. 절대로 죽지 않는 적이 쫓아오는데 탄약은 항상 부족하다. 그래서 내내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모퉁이의 어둠을 보면 긴장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4편과 5편, 6편의 흥행을 이끌었던 액션성도 일정 부분 이식해 놓았다.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총을 들고 시작한다. 샷건도 주고, 유탄도 주고, 쏴죽일 좀비와 괴물도 계속 기어나온다. 조준점을 유지하면 정밀 조준도 가능하고 좀비의 팔다리를 끊어놓는 전략적인 부위파괴도 구현되었으며, 어딘가 조금 부족했던 7편의 괴물들에 비해 훨씬 <바이오하자드>스러운 인카운터와 보스전 역시 잔뜩 준비되어 있다. 보이는 대로 다 쓸어버리는 식의 플레이는 불가능하지만(체술도 없고 나이프도 소모식이라 탄약이 바닥나면 싸울 수단이 아예 없다), 그래도 충분히 적과 맞서 싸우는 재미를 느낄 정도는 된다. 굳이 따지자면 쫓아오는 추격자를 피해 도망치는 전반부는 호러가 맞는 것 같고, 지하의 비밀 연구소로 내려가 보스들을 차례차례 격파하는 후반부는 본격적인 액션에 더 가깝다. 


또 하나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RE:2>의 리메이크적 성격이다. 제작진은 오리지널 <바이오하자드 2>에서 모티브만 얻은 완전히 새로운 게임으로 봐달라고 하지만, <RE:2>는 과장 좀 보태서 리마스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시점이나 그래픽, 시스템의 완성도 등은 (당연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RE:2>는 그 당시 게임이 추구하는 감성의 대부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초반부 퍼즐은 문 하나를 열기 위해 똑같은 곳을 계속 지나다녀야 하는 반복적인 구조이고, 난이도 역시 다른 AAA 게임에 비해 확연히 높으며(심지어 이번 타이틀에서는 적응형 난이도가 적용되어 플레이어가 잘하면 잘할수록 난이도가 실시간으로 높아진다), 전체적인 조작감 역시 상당히 느릿하다. 이런 요소는 분명 양날의 검이다. 시리즈 고유의 팬들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선물이겠지만, 라이트 팬들 및 신규 유저들에게는 어느 정도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오리지널 <바이오하자드 2>가 아무리 명작이었다지만 이미 20년 전 게임이다. 그 당시이기 때문에 허용되었던 요소를 현대 AAA 타이틀에 도입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근-본에 충실한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그저 시대착오적인 디자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물론 리메이크라는 태생이 단점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따지자면 장점도 굉장히 크다고 하는 것이 공정하겠다. 새로운 때깔로 재창조된 고전 명작을 보는 것 자체도 즐겁고, 최신 게임과는 다른 감성이 묘하게 힙스터적 재미를 자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건 바로 캐릭터들이다. <바이오하자드>는 일본식으로 살짝 과장된 캐릭터성을 빼놓을 수 없는 시리즈였다. 레온, 클레어, 크리스, 질 등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캐릭터들은 <바이오하자드>의 아이덴티티이자 여타 좀비 게임들은 가지지 못한 무기이기도 하다. <바이오하자드 7>은 이런 부분에서 많이 취약했다. 메인 스토리라인에서 동떨어진 외전인데다가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살아남기 힘든 1인칭 시점의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오하자드 7> 주인공의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는가? 목소리는? 아마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반면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레온과 에이다, 클레어는 마치 오랫만에 만난 동기들처럼 반갑고 게임에 쉽게 몰입하도록 도와주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는 아무리 명작이어도 역사가 짧은 게임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오래된 프랜차이즈만이 가지는 힘이다.



앞서 말했듯 <바이오하자드 7>의 성공은 판매량이 뒷받침되지 않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비록 호러 게임으로서 비평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캡콤은 상업적인 지표를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RE:2>는 캡콤의 줄타기같은 느낌이 강하다. 민트와 초코, 호러와 액션, 비평적 성공과 상업적 흥행의 비율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게이머를, 시장을 조금씩 시험해보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본격적인 사격 시스템을 넣었는데 어때? 무서워? 여기에서 회피랑 발차기를 넣어도 계속 무서워해 줄거야? 나이프를 무한 내구도로 만들면 시시할까? 어느 기둥을 세우고 어떤 지붕을 올려야 제일 멋진 게임이 될 것 같냐고, 캡콤은 <바이오하자드>를 낱낱이 분해한뒤 하나씩 재구축하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유의미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RE:2>는 <바이오하자드 7>보다 손맛이 좋고, <바이오하자드 6>보다 훨씬 무섭다. 어설픈 혼합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함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RE:2>는 다행히 트위너의 함정을 피해가는 데에 성공한다. 민트초코인지 초코민트인지, 살짝 헷갈릴 정도로 잘 배합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맛있다. 캡콤의 다음 질문은 <바이오하자드 3>의 리메이크일까, 아니면 <바이오하자드 8>일까? 어느 쪽이든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생상해 보시라. 차세대 엔진으로 스타-즈를 외치는 네메시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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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Marvel's Spider-man, PS4 독점)


사진출처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


의외의 사실 하나. 마블 코믹스의 그 수많은 히어로 중 가장 인기가 많은 히어로는 단연 스파이더맨이다. 아이언맨이건 캡틴 아메리카건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각종 캐릭터 상품과 굿즈의 판매량만 보아도 그렇다. 스파이더맨은 아메리칸 코믹스 히어로를 통틀어서도 가장 많은 수익을 내는 캐릭터이며, <어벤져스>가 한꺼번에 덤벼도 스파이더맨 하나의 전 세계 굿즈 판매량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마블이 해체 위기에 놓였을 때 스파이더맨의 영화화 판권을 낼름 집어온 소니의 혜안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샘 레이미의 탄탄한 3부작부터 발랄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까지 매번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스파이더맨의 위력을 보고 있자면 잘 만든 허구,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의 힘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스파이더맨도 비교적 힘을 쓰지 못하는 분야가 있었다. 바로 게임이다. 이제껏 스파이더맨의 이름을 달고 나온 수많은 게임들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많이 구렸다. <스파이더맨>(2000)이나<스파이더맨 2>(2004), <스파이더맨: 웹 오브 쉐도우즈>(2008) 등 그중 나름대로 괜찮은 타이틀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마저도 결국 매니아들을 위한 게임에 지나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 말 출시된 게임 <마블의 스파이더맨>(이하 스파이더맨)은 다르다. 스파이더맨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없더라도 재밌다. 심지어 2018년의 웬만한 게임보다 훨씬 낫기까지 하다.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웹 스윙의 빼어남이다. <스파이더맨>의 웹 스윙은 거의 압도적이기까지 한 경험이다. 웹 스윙은 <스파이더맨2>에서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는 틀렸다. PS4의 성능으로 연산된 뉴욕은 생동감으로 가득 차있고, 사운드와 모션 블러를 활용해 속도감을 연출하는 솜씨 또한 기가 막히다. 창문에 저녁 노을이 비치는 뉴욕의 도심을 날아다니는 기분은 오직 <스파이더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치다. 조금 오버하자면, 이 웹 스윙 하나만으로도 <스파이더맨> 구매를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


액션도 마찬가지다. <스파이더맨>의 액션은 심플하고, 호쾌하다. 피가 튀는 묵직한 싸움을 원한다면 아무래도 실망하겠지만, 대신 만화적인 발랄함과 날렵함이 가득하다. <배트맨: 아캄>시리즈의 그것을 한 톤 밝게 만든 모습을 생각하면 되겠다. 약간 과장된 듯한 손맛도 좋고, 후반부로 갈 수록 점점 새로운 적들이 나와 머리를 써야 하는 점도 멋지다. 또 의외로 마냥 쉽지도 않다. 달리 말하면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 계속 유지된다는 점인데, 이는 <스파이더맨>처럼 캐주얼한 외형을 가진 게임에 있어 큰 장점이다. 다채로운 보스전도 마찬가지다. 비록 보스들의 패턴이 그리 다양하지 않고 공략법 또한 비교적 간단하지만, 다들 개성이 살아 있으며 보스들 간의 모션 재활용이 없어 정신없이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점은 바로 <스파이더맨>이 의외로 탄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위쳐 3>나 <레드 데드 리뎀션 2>, <갓 오브워>에 비할 바는 아니다. <스파이더맨>은 어디까지나 슈퍼 히어로 게임이고, 따라서 클래식한 슈퍼 히어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영웅과 희생과...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거기에 각종 액션과 미션을 끼워넣어야 하니 다소 불균질한 부분도 눈에 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이런 진부한 내러티브를 진부하지 않게 진행하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한다. 의외로 몰입하게 되며, 의외로 다음 스토리의 진행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차근 차근 쌓아올린 이야기의 종장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감정적 울림을 주기까지 한다. 그간 나온 스파이더맨 영화나 게임들과도 전혀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앞으로 나올 슈퍼 히어로 게임들에게 하나의 참고점이 될 수도 있을 정도다.


결론적으로, <스파이더맨>은 재미있는 게임이다. 히어로 게임으로써의 태생적인 한계를 받아들이는 대신 오직 히어로 게임, 그 중에서도 스파이더맨 게임만이 줄 수 있는 재미를 잘 응축해냈다. 당연히 단점이 없지는 않다. 마일즈는 반가웠지만 스토리상 꼭 필요했을까? 싸우지 못하는 잠입 플레이를 넣고 싶었다면 메리 제인에게 더 많은 비중을 줬으면 될 일인데. 반대로 게임의 무대가 되는 오픈 월드는 상당히 알맹이가 부실하다. <위쳐 3>, <레드 데드 리뎀션>, <GTA>등 방대한 오픈 월드를 자랑하는 게임들과 비교하면 그 크기도 작고 즐길 수 있는 컨텐츠 자체도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몇몇 사이드 컨텐츠는 단순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살짝만 변형해 복붙한 티가 난다. 쫓는 것이 비둘기든 드론이든 아니면 도시의 스모그든 실제로 플레이어가 하는 일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일까. 하지만 이런 단점들이 <스파이더맨>의 성취에 흠집을 내지는 못한다. 장점이 줄 수 있는 만족감이 그만큼 다른 게임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맨의 팬이라면 무조건 해봐야 할 타이틀이고, 팬이 아니더라도 무난히 재밌게 할 수 있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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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오브 라이트
2017. 10. 1. 14:53 - 북북서


<차일드 오브 라이트>, 유비소프트, 사진 출처 플레이스테이션 공홈.


스팀을 시작한 뒤로 내 게임 철학은 혹하면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이 되었다. 산 지 14일 이내, 플레이 시간 2시간 이내라면 무조건 환불이 되니까다. 물론 이렇게 우선 지르다 보면 깔았다가 지웠다가 환불을 요청했다가 하는 귀찮음이 크다. 그러나 그 대신 지르지 않았으면 평생 해보지 못했을 수작들을 만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너무나도 재미있는 게임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상당하다. <차일드 오브 라이트>도 그렇게 해서 만난 타이틀 중 하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체적인 미술이다. 너무 예쁘다. 어린 공주가 세상의 빛을 빼앗아간 밤의 여왕을 무찌른다는 메르헨같은 이야기에 어울리도록 모든 그래픽이 수채화처럼 채색되어 있으며 공주, 쥐, 난쟁이를 비롯한 등장인물은 물론 각종 적들과 보스의 디자인 역시 마치 동화의 삽화처럼 아기자기하다. 색감도 좋고 각종 모션도 부드럽다. 심지어 이들은 모든 대사를 고풍스러운 시조로 말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대놓고 동화적인 컨셉을 잡은 게임은 인디 게임 중에도 드문 편인데, 심지어 <차일드 오브 라이트>는 초거대 기업 유비소프트에서 만든 게임이다. <워치독스>나 <어쌔신 크리드>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이런 게임이 제작되었는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차일드 오브 라이트>, 유비소프트, 사진 출처 스팀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면 <차일드 오브 라이트>는 그저 단순히 컨셉이 독특한 게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차일드 오브 라이트>를 솔리드한 수작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특유의 전투 시스템이다. 그 핵심은 바로 전투 화면 밑에 있는 저 막대 그래프다. 기본적으로 캐릭터가 WAIT 칸을 지나 CAST 칸에 닿으면 행동을 선택할 수가 있으며, CAST 칸에 끝에 도달하면 그 행동이 발동하는 구조를 띄고 있다. 그런데 그 행동의 종류에 따라 이 CAST 칸을 지나는 속도, 즉 캐스팅 속도가 다르며 당연히 강한 행동일수록  캐스팅 속도가 느리다. 이게 왜 문제가 되나면, CAST 도중에 공격을 받아 버리면 CAST가 풀리며 다시 WAIT 칸의 중간으로 밀려 버리기 때문이다! 초반에야 별다른 변수가 없지만 중반을 넘어가며 3 대 3의 전투가 잦아지게 되면 이 CAST의 관리에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하며 자칫하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잡몹한테 맞아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어진다.


뿐만 아니다. 전투 중에 마우스 커서는 이그니쿨루스라고 하는 불빛으로 대체되는데, 이 불빛을 적에게 대고 흔들어 적의 캐스팅을 느리게 하거나 아군에게 비춰 약간의 체력을 회복시켜줄 수가 있다. 보스한테도 통하며 여러모로 긴요한 테크닉이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상당히 쫄깃한 컨트롤을 해줘야 한다. 또한 각 캐릭터마다 고유의 스킬과 스킬트리가 마련되어 있으며 눈동자라고 불리는 보석을 박아 공격에 속성을 부여해 주거나 능력치를 올려줄 수가 있다. 물리 / 마법의 구분 또한 당연히 되어 있으며 보스나 중간보스, 심지어는 잡몹들에게도 내성과 무효, 치명타 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항상 파티를 정돈해줘야 한다. 즉 어지간한 RPG의 요소들은 전부 가지고 있는 거다. 이런 전투 시스템은 매우 직관적이면서도 의외로 경우의 수가 많아 게임 플레이 내내, 심지어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잡몹과의 싸움조차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준다.


<차일드 오브 라이트>, 유비소프트, 사진 출처 게임스팟


물론 <차일드 오브 라이트>에도 아쉬운 점은 존재한다. 게임 자체의 볼륨이 상당히 적다는 점이다. 맵에는 표시되어 있는데 가볼 수 없는 지역들이 있으며 후반부 중간 보스와 최종 보스와의 보스전이 연이어 발생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봤을 때 아마 게임 개발이 급하게 마무리지어지며 후반부의 스토리가 대폭 잘려나간 게 아닌가 한다. 나름 RPG임에도 사이드 퀘스트나 2회차 플레이를 유도하는 요소 또한 빈약해 더욱 안타깝다. 또한 초반에 얻는 동료와 후반에 얻는 동료의 능력치 차이가 상당히 큰데, 그래서 능력치를 초반 동료에게 몰아준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이 역할이 겹치는 후반부 동료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역시 사소하지만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짧은 플레이타임에도 불구하고 <차일드 오브 라이트>는 분명 스팀 정가인 $14.99의 값어치는 충분히 하는 게임이다. 3D그래픽과 날아드는 총알, 터지는 폭탄과 쏟아붓는 AAA급 타이틀에 피로가 쌓였다면 예쁘고 흥미진진한 <차일드 오브 라이트>를 통해 클래식한 턴제 RPG로 돌아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단, 웬만하면 한글 패치를 받을 것을 권장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셰익스피어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시조로 말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영어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해가 어려울 수 있다.



라스트 오브 어스, 그 장면
2017. 8. 6. 01:55 - 북북서

<라스트 오브 어스>, 영상출처 GmBashell 유투브


<라스트 오브 어스>의 겨울은 강렬한 챕터였다. 엘리와 조엘의 시점이 교차되며 고조되는 서스펜스는 혹독했고 내내 몰아치는 눈보라는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절정부에 이르러 엘리가 칼을 내리칠 때는 거의 호흡곤란이 일어날 지경이었으며, 마침내 조엘이 엘리를 끌어안으며 아가(Baby girl)이라고 부르는 순간은...


그리고 봄, 그리고 기린. 아, 평화. 안정. 순수. 아, 다시 봐도 혈관에 따뜻한 코코아가 흐르는 느낌이다. 이 기린 시퀀스는 조엘과 엘리로 하여금 겨울에 일어난 일을 넘어서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기점이며, 동시에 그들이 여태껏 겪은 정신적 소모를 치유하는 기능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격렬한 겨울 챕터가 끝나고 그 여운과 탈력감에 지친 플레이어 역시 마찬가지다. 목줄기를 물어뜯으러 오는 클리커에게 시달리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지도 못한 평화와 맞닥뜨리게 되니 그만 꼼짝없이 치유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기린 시퀀스는 게임 스토리텔링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컷신도 아니고 강제적 카메라 고정은 더더욱 아니다. 자연스럽게 기린을 보고 그것이 어떤 상징인지, 어떤 장치인지 인지하기 이전에 빠져들게 한다. 연출부터 음악까지 그야말로 마술적이다. 그러니까 라오어 2좀 빨리 내주세여 너티독 나으리들 100달러라도 사드리리오니

스펙 옵스 : 더 라인(2012)
2017. 7. 27. 18:13 - 북북서


<스펙 옵스 : 더 라인(Spec Ops : The Line)>, 2012
사진출처 스펙옵스 위키


비디오 게임과 폭력은 거의 항상 상호보완적인 관계였습니다. 현실의 폭력은 게임의 좋은 소재를 제공했고, 게임은 현실에선 구현할 수 없는 폭력을 가능케 해 주었죠. 게이머라면 모두 화면 안의 적에게 폭력을 가하는 데에 익숙해요. 8비트의 시절부터 우리는 한 칸씩 내려오는 외계인에게 총을 쏘거나(<스페이스 인베이더>), 앞을 가로막는 버섯의 머리를 신나게 밟아왔습니다(<슈퍼마리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버섯의 머리가 찌그러지는 그 손맛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죠.

문제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그 폭력의 대상이 놀랍도록 리얼해지며 발생했어요. 죽이는 대상이 단순한 도트 덩어리에서 누가 봐도 너무나 완벽한 생명체가 되어버리자 자연히 폭력의 심리적 반동도 리얼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 1978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에 개발자들은 혹시라도 게이머들이 너무 심한 죄책감에 게임을 끄는 일이 없도록 심리적 방어막을 준비합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문득 느낀 적이 있을 거에요. 일종의 마취 주사인데, 바로 적에게서 플레이어가 적에게 감정을 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이 작업은 주로 적을 아무 도덕적 딜레마 없이 죽여도 좋은 명분과 상황을 조성해줌으로서 이루어집니다. 게임에서 우리가 쏘아 죽이는 적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쁜 놈들입니다. 하나같이 흉악한 음모를 꾸미거나 그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어요. 세상을 구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저들을 죽여야 합니다. 플레이어는 선하고 정의로운데, 적은 악한데다 오히려 플레이어를 공격합니다. 그러면 어쩔 수 있나요, 쏴야죠. 적이 인간이 아닐 경우 이 작업은 한결 더 쉽습니다. 제아무리 공감능력이 투철한 사람이어도 자신을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끔찍한 좀비와 괴물들에게 이입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두 가지가 다 합쳐진 좋은 예로는 <콜 오브 듀티> 프랜차이즈에 꾸준히 등장하는 나치 좀비들이 있겠습니다. 얘네는 인류 역사상 몇 안되는 공통된 절대악인 나치 나쁜놈들인데 세상에, 거기에다가 좀비이기까지 해요. 얼마든지 마음놓고 쏴도 되는 좋은 표적인 셈이죠. 이입할 수 없으니, 죄책감도 없습니다. 


반대로 이런 심리적 방어막 없이 플레이어가 죄책감에 그대로 노출된 예로는 그 유명한 <노 러시안> 미션이 있습니다. 2009년, <콜 오브 듀티 : 모던 워페어2>는 그 뛰어난 게임성만큼이나 격렬한 논란을 불러왔어요. 초반부 <노 러시안(No Russian)>이라는 이름의 미션이 문제였죠. 미션은 공항 엘리베이터에서 시작합니다. 플레이어의 양 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팀원들이 있습니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팀원들은 공항에 가득 찬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콜 오브 듀티 : 모던 워페어 2(Call of Duty : Modern Warfare 2)>, 2009

사진출처 MTU DGE 유투브


그간 게임산업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아무 죄도 없고 저항하지도 않는 민간인들을, 그것도 이렇게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이 미션의 임무였던 적은 없었어요. 당연히 큰 논란을 불러오게 되었죠. 비록 제작진이 이 미션을 스킵하는 옵션을 만들어두긴 했지만 결국 일본과 독일을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는 <노 러시안> 미션 동안 플레이어는 총을 쏠 수 없도록 하는 스크립트를 삽입했고, 러시아는 콘솔판 전량 회수, PC판은 미션 자체를 삭제해버리는 조치를 내립니다. 


하지만 이 <노 러시안>의 섬뜩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반전이 하나 있으니, 사실 <노 러시안>을 플레이하면서 민간인을 쏴죽이지 않아도 게임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걸리지만 결국 팀원들이 민간인들을 다 살해하기 때문이에요. 결과는 같지만 적어도 플레이어가 직접 민간인을 죽일 필요는 전혀 없었던 거죠. 즉, "어떻게 이런 짓을 하지?"하며 이 학살에 동참하지 않아도 미션은 알아서 진행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제작사 인피니티 워드 측에서 밝힌 자료에 의하면, 베타 테스트 당시 10명 중 단 1명만이 이 미션에서 민간인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고 해요. 10명 중 단 1명 말입니다. 아마 이 미션을 플레이하게 된 일반 게이머들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현실이었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90%의 플레이어는 여기서 죄없는 민간인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왜? 의견은 분분합니다. 미션이라서. 해야 하는 줄 알고, 그냥... 그러나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게임이라서, 일 겁니다. 게임은 습관화된 폭력이 용인되는 공간이고, 진짜가 아니므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그저 그것뿐일까요? 


<스펙 옵스 : 더 라인>, 사진출처 스팀


<스펙 옵스 : 더 라인>은 바로 이 습관화된 폭력에 의문을 던지는 게임입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로 만들어지기도 한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를 원작으로 두고 있죠. 시작은 여타 슈팅 게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래폭풍이 불어닥친 두바이, 주인공 워커 대위는 모래폭풍에 고립되어버린 존 콘라드 대령과 그가 지휘하는 33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투입됩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두바이는 처참하게 망가져 있고 33대대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이고 있어요. 워커 대위는 알 수 없는 무전기 하나에 의지해 이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콘라드 대령을 찾으려 합니다. 그의 앞에 어떤 광기와 지옥도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게임은 처절한 망가짐의 플롯입니다. 진실은 모호하고 진위는 의심스럽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플레이어는 더더욱 가혹한 상황에 몰려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옳은 것 같았던 행동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고, 그 결과는 또다른, 그리고 점점 더 가파른 지옥으로 워커 대위를 인도해요. 그리고 이는 중반부 워커 대위가 수십명의 민간인을 산 채로 태워죽이게 되면서 절정에 달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밝혀지는 진상은... 워커에겐 거의 고문과도 같은 무언가입니다. 언급해두자면 이 게임이 18세 이용가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잔인하기도 하거니와 정신적으로 몰리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에요. 외국 웹에선 이 게임을 PTSD 시뮬레이터라고 부르기까지 하더군요.


영웅이자 구원자로서 파견된 워커 대위가 모래폭풍을 허우적거리며 점차 살인자로 추락해가는 동안, 게임의 모든 요소가 그에 따라 변화합니다. 처음에 서로 농담을 건네기도 하며 밝은 모습을 보이던 분대원들은 점차 잔혹하고 폭력적인 성격으로 변해갑니다. 적을 죽이게 되면 초반에는 "적이 무력화되었다(Target neutralized)"고 하던 것이, 중반에는 "죽었어(He's dead)"로, 그리고 후반에 접어들면 "이 씨발새끼(Son of a bitch!)"로 바뀌는 식입니다. 각종 전투 모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쓰러진 적에게 다가가 확인사살 커맨드를 입력하면 머리에 한 발을 쏘던 워커 대위는 후반에 접어들면 거친 욕을 토해내며 목을 밟아 분질러 버리며, 다리에 먼저 한 발을 쏜 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머리를 쏘기도 해요. 잔혹한 경험으로 피폐해진 그의 인격을 드러내는 연출이자, 미국식 영웅주의에 대한 훌륭한 냉소에요. 하지만 게임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스펙 옵스 : 더 라인>의 로딩 화면은 언뜻 평범합니다. 다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플레이 팁과 조작법을 알려주는 정도죠. 하지만 게임이 진행되며 어느 순간이 지나면 로딩 화면의 문구가 묘하게 바뀝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화면을 넘어 플레이어를 비난하기 시작해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이건 모두 당신 잘못입니다

This is all your fault.


스스로를 위해 죽이는 것은 살인입니다. 국가를 위해 죽이는 것은 영웅적입니다. 재미를 위해 죽이는 것은 무해합니다

To kill for yourself is murder. To kill for your government is heroic. To kill for entertainment is harmless.


미군은 비무장 전투원을 사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현실도 아닌데, 당신이 신경써야 합니까?

The US military does not condone the killing of unarmed combatants. But this isn't real, so why should you care?


이 메시지들은 전쟁, 살인, 폭력의 현실성에 무감각해져 그저 게임의 요소로만 여겼던 플레이어에게 들이붓는 찬물과도 같습니다. 이 메시지들을 읽는 순간 플레이어는 깨닫게 됩니다. 워커 대위가 내린 결정, 워커 대위가 죽인 사람들은 사실 플레이어 자신이 내린 결정이고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게임 내에서 워커 대위가 "뜻하지 않게",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살인과 훌륭한 아날로지를 형성하며 플레이어를 비웃습니다. 봐, 너랑 뭐가 달라? 플레이어와 워커 대위 사이의 감정적 간격은 줄어들고, 어느 순간 플레이어는 폭력의 주체로서 자신이 저지른 참상을 응시하게 됩니다.


물론 게임 내의 살인이 죄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죄일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이를 단순한 오락적 요소, 전쟁 영웅 이야기의 부품으로 가공해 즐기는 태도가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겠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를 다루는 <스펙 옵스 : 더 라인>의 화법입니다. 이는 오직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메타픽션이에요. 영화나 책에서 관객은 말 그대로 순수한 관객이죠. 관객과 독자가 무슨 짓을 하건 영화나 책 자체에 어떤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달라요. 플레이어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자 동시에 게임의 상호작용을 진행하는 주체잖아요. 게임의 주인공은 플레이어의 통제를 받는 존재이며 그의 분신이죠. <스펙 옵스 : 더 라인>은 게임의 이런 특성, 즉 사람과 매체 사이의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는 점을 훌륭하게 활용해냄으로서 게임이 다른 형태 못지않은 예술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냈습니다. 


<스펙 옵스 : 더 라인>, 사진출처 스팀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펙 옵스 : 더 라인>은 그 내러티브만큼 게임성이 훌륭한 게임은 아닙니다. 모래폭풍에 휩싸여 무너진 두바이의 배경 디자인은 분명 아름답고, 분대 시스템을 이용한 전투나 각종 무기의 타격감도 나쁘지 않죠. 하지만 슈팅 게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총싸움의 조작감 자체는 <콜 오브 듀티>나 <배틀필드>시리즈에 비하면 너무나 뒤떨어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반부에 이르러 적이 갑자기 많아지고 전투가 뜬금없는 곳에서 가파르게 힘겨워지는 등 난이도 조절 역시 조금 불균질합니다. 2회차 플레이를 유도할 만한 요소도 물론 전무하고요. 엄폐와 근접공격이 같은 키로 배분되어 있는 점 역시 조금 의아합니다. 엄폐를 해야 하는 타이밍에 일어서 개머리판을 휘두르다 게임 오버 당한 경험이 생각보다 흔했습니다. 조금은 더 플레이어를 배려해도 좋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스펙 옵스 : 더 라인>은 게이머라면 한번쯤 해볼만한 타이틀입니다. 이 게임의 주제의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콜 오브 듀티>식 전쟁 영웅 서사의 안티테제로서 이 게임이 가진 힘은 상당해요. 이야기 그 자체로도 재미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간 우리가 무감각하게 소비해온 전쟁과 폭력을 뒤돌아보게 되는 경험은 정말 흔치 않습니다. 그동안 설탕을 씌워 멋지고 달콤하도록 정제한 폭력에 길들여진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스펙 옵스 : 더 라인>, 사진출처 디스이즈게임


헤비한 게임을 해보고 싶으신 분

멘탈이 빠개지는 느낌을 좋아하시는 분

게임의 가능성을 엿보고 싶으신 분


비추천

게임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으신 분

때려부수고 재밌는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

쉬운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


Little Devil Inside
2017. 2. 6. 21:22 - 북북서



리틀 데빌 인사이드(Little Devil Inside)는 네오스트림 인터렉티브에서 제작 중인 인디 게임이다. 킥스타터에서 후원을 받고 있으며 2018년 출시 예정이다. 개발자 형제가 한국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https://www.kickstarter.com/projects/ldi/little-devil-inside)


숨막히게 예쁘다. 디자인은 미니멀하고 빛 표현은 그야말로 감각적이다. 대체 어떤 게임일지 감도 오지 않는다. 2018년을 기다릴 이유가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