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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길라잡이 2편
2017. 9. 18. 16:58 - 북북서


KBC 포커 2 적축 타건 영상. 출처 유투브 Rhinofeed 채널.

작동방식으로 분류하기(계속)

4. 기계식 키보드

레오폴드 FC750R 갈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Jayin Lee 채널.


드디어 기계식 키보드 차례다. 현재 키보드 문화의 메인스트림이자 가장 핫한 방식의 키보드다. 고오급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데 사실 이는 최근 들어 진행된 고급화의 결과로, 멤브레인 키보드가 발명되기 전에는 기계식 키보드가 일반적으로 흔하게 쓰이는 키보드였다. 값싸고 조용한 멤브레인 키보드가 보급되자 한동안 자취를 감췄으나, 2000년대가 넘어가면서 특유의 키감을 잊지 못한 마니아층이 형성되었고 멤브레인과 차별화를 위해 고급화가 진행, 마침 폭발적으로 커지는 게임 산업과 맞물려 성장한 게이밍 기어 시장을 장악한 것이 지금의 기계식 키보드다. 


처음으로 기계식 키보드를 접한 이들이 가장 놀라는 부분은 바로 무게다. 기계식 부품들이 들어갈 뿐더러 스위치를 고정하기 위한 보강판이 썡 금속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들어보면 상당히 묵직하다. 또한 멤브레인보다 키압이 낮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입력 키압 자체는 기계식 키보드가 더 높다. 기계식 키보드는 스프링을 사용하는 구조 상 누를수록 압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시작 키압이 가벼우며 거기에 경쾌한 소리와 촉감이 있기 때문에 더 가볍게 눌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보는 쪽이 맞다.


장점 키감은 분명 개인차의 영역이지만 기계식 키보드가 멤브레인 키보드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키감이 좋다고 느껴질 여지가 많다. 또한 물이나 각종 오염 물질에서만 보호해 준다면 거의 반영구적인 수명을 자랑한다.


단점 비싸다. 좋은 키보드를 구하려면 10만원 이상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소음이 상당하다는 점도 단점인데, 아무리 조용한 기계식 키보드라도 멤브레인만큼 정숙하지는 못하며 이는 사용 장소에 약간의 제약이 있음을 뜻한다.


메커니즘을 보자면 스프링과 기계식 스위치를 그 핵심으로 한다. 같은 기판의 같은 모델이어도 이 스위치(축)의 종류에 따라 그 키감과 장단점이 확연히 나뉘기 때문에 대충 무슨 축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좋다. 색깔+축을 붙여 부르며, 일반적으로는 독일의 체리 사가 만든 구분을 따른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네가지 축은 다음과 같다.


청축 


덱 프랑슘 청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GSX-S1000F SUZUKI 채널. 


클릭(Click)이라고도 한다. 슬라이더가 파란 색이라 청축이다.가장 일반적인 축이자 가장 기계식 키보드다운 축이다. 높고 경쾌한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손끝에 살짝 걸리는 느낌을 준다. 이 손끝에 살짝 걸리는 느낌 덕분에 입력이 되고 안 되고의 구분이 확실하며, 키가 확실히 눌렸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격투게임이나 리듬게임같은 장르의 게이머들이 즐겨 찾는다. 기본이 되는 체리 사의 청축은 정갈하고 맑은 느낌인 반면 오테뮤 사의 청축은 보다 찰지고 거친 소리가 난다. 


추천 묻지마 A/S와 기괴할 정도로 친절한 사후지원으로 유명한 덱 사의 헤슘과 프랑슘이 체리 청축의 정석이라고 할 만 하다. 가성비를 찾는다면 5만원대에서 체리 청축을 써볼 수 있는 한성의 GTune MCF7도 좋겠다. 보통 체리 축 키보드들이 10만원을 우습게 넘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혜자다.



갈축


레오폴드 FC750R 갈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Jayin Lee 채널.


넌클릭(Non-click)이라고도 한다. 슬라이더가 갈색이라 갈축이다. 청축과 비슷하지만 청축보다 부드러운 키감을 가지고 있으며 크게 찰칵거리는 대신 작고 조용한 구분감을 준다. 입력 키압 자체도 청축에 비해 낮아 장시간 타이핑시 손에 무리가 덜하다.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손맛은 원하지만 청축의 요란한 소음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추천 레오폴드 사의 FC900R과 FC750R, 미니 배열도 괜찮다면 FC660M이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키캡의 각인이 잘 지워진다는 문제점이 있었으나 최근 개선판이 발매되며 완전체가 되었다. 키캡이 ABS이긴 하나 역시 갈축계의 클래식이자 스테디셀러인 필코 사의 마제스터치 역시 유명하다.


흑축


매직포스 68 흑축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Stabilized 채널.


리니어(Linear)라고도 한다. 슬라이더가 검은 색이라 흑축이다. 청축과 갈축과는 달리 중간에 구분감을 주는 부품이 없다. 따라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으며 눌렀을 때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없이 바닥까지 쭉 내려간다. 하지만 그만큼 강한 스프링을 쓰기 때문에 반발력이 강하며, 키압 자체도 다른 축들에 비해 높아 장시간 타이핑 시 손에 부담이 비교적 크다. 하지만 이 특유의 쫀득한 키감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고 전해지는 등 어느정도 마니아층이 있는 축이기도 하다.


추천 레오폴드 사의 흑축이 무난하다. FC750R과 FC900R, 미니 배열도 괜찮다면 FC660M. 다만 레오폴드의 흑축은 타 제조사의 흑축보다 조금 키압이 낮은 경향이 있다고들 하니 참고하자. 덱과 바밀로의 흑축 라인업도 평가가 좋다. 



적축



역시 리니어(Linear)라고도 한다. 슬라이더가 빨간색이라 적축이다. 흑축에서 파생되어 나온 축이며, 기본적인 구조는 흑축과 동일하지만 흑축보다 약한 스프링을 써서 키압을 굉장히 많이 낮춘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인 기계식 키보드 중에 가장 키압이 낮다고 알려져 있으며, 키압이 낮으니 키 입력까지 걸리는 시간도 가장 적어 빠른 입력이 중요한 게이머들에게 인기가 많다. 하지만 너무 가벼운 키압 때문에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기만 해도 입력이 되어버려 플래시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주의. 참고로 오테뮤 사의 적축은 체리 사의 적축보다 키압이 무겁다. 


추천 주로 게이머들에게 어필하는 축이니만큼 커세어 사의 K70을 위시한 적축 라인업이 유명하다. 다만 보다 저렴한 구매를 위한 배송 대행을 회사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해외 직구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알아둘 것.



다음 편에서 계속. 키보드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정전용량 무접점 키보드와 기타 다른 키보드를 다룰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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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키 Shine II 갈축 타건 영상. 출처 유투브 Rhinofeed 채널



■ 시작


사실 키보드는 키만 잘 눌리면 장땡이다. 분하지만 반박할 수 없다. 사은품으로 낑겨주는 몇천 원 짜리 싸구려 키보드나 30만원을 호가하는 해피해킹 키보드나 근본적인 기능 자체의 차이는 전혀 없다. 매일 굉장히 많은 양의 타이핑을 하는가? 지금 쓰는 키보드 때문에 손목이나 손가락이 아픈가? 지금 쓰는 키보드가 부서졌거나 고장이 났는가? 아니라면 당신은 굳이 비싼 기계식/무접점 키보드를 구매할 필요가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근본적인 기능에서 벗어나 부가적인 요소로 들어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계식/무접점 키보드를 위시한 비싼 키보드들은 분명 싼 키보드와는 다른 종류의 감각을 선사한다. 더 편하고, 관능적이다. 키를 눌렀을 때 미세하지만 확연하게 느껴지는 차이가 있다. 이 작은 차이가 그렇게 큰 가격차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나는 분명히 그렇다고 믿는다. 업무의 능률적인 면에서든, 감성적인 만족감이든 말이다.


이 시리즈는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을 위해 민망함을 무릅쓰고 쓰는 키보드 입문서이다. 더 방대하고 더 정확한 정보를 위해서는 관련 커뮤니티를 찾아가 볼 것. 대표적인 커뮤니티들은 다음과 같다. 


키보드매니아

쿨엔조이 키보드/마우스 게시판

OTD

키보드랩




■ 키보드의 종류


키보드는 크게 작동방식배열의 2가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작동방식으로 분류하기


1. 멤브레인 키보드


델 KB212-B 타건 영상. 출처 유투브 hachi8free 채널


멤브레인 키보드는 가장 흔하고 기본적인 종류의 키보드다. 이태껏 키보드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면 아마 이 키보드를 쓰고 있을 확률이 높다. 얇은 플라스틱 막을 겹쳐서 만든 스위치이며, 대부분의 경우 러버돔이라 불리는 둥근 고무의 반발력으로 키감을 형성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멤브레인은 스위치의 종류이며 러버돔은 반발력을 위한 부품이기 때문에, 멤브레인 키보드라고 반드시 러버돔을 사용하지는 않으며 반대로 러버돔을 사용한다고 멤브레인 키보드도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는 이야기.


키감 부드럽고 물컹거린다. 


장점 가격이 싸다. 싼 제품은 만 원, 아니 몇천 원으로도 충분하며 가장 대중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구하기도 용이하다. 따로 소음을 낼 만한 기계적인 장치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모든 키보드 중에 대체로 가장 조용하다. 기계식 키보드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저가형 제품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고급형 제품군은 상당한 키감과 만듦새를 보여주기도 한다. 


단점 싼 만큼 수명이 짧다. 거의 반 영구적인 기계식 키보드와는 달리 사용할 수록 러버돔이 경화되어 뻣뻣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키감 자체도 장시간 타이핑 시 손에 피로가 쌓이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작가, 프로그래머 등 장시간 타이핑을 지속하는 직업군이 결국 기계식/무접점 키보드를 알아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단점으로는 대부분의 경우 동시입력을 지원하지 않는다. 보통 6 ~ 8개 이상의 키를 빠르게 누를 경우 입력이 씹히는데, 일반적인 용도에서야 큰 문제가 없지만 게이머들에겐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아예 게이밍 키보드로 나온 제품군은 예외이다.


추천 클래식한 모델이자 옛날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의 명기였던 삼성전자(현재는 큐센) DT35가 유명하다. 멤브레인 최초로 무한동시입력을 지원한 게이밍 키보드인 스카이디지탈 NKEY-1, 균형잡힌 가격과 성능의 아이락스 6220도 호평받는 제품. 대놓고 게이밍인 디자인도 괜찮다면 제닉스의 타이탄 SE도 좋다.



2. 펜타그래프 키보드


TypeMatrix 2030 타건영상. 출처 유투브 KeyChatter.com 채널


가위 스위치(Scissor switch)라고도 한다. 멤브레인 스위치를 쓰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멤브레인 키보드겠으나 키감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보통 구분한다. X자로 엇갈린 모양의 얇은 플라스틱 장치와 멤브레인 스위치, 그리고 작은 러버돔으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키캡과 스트로크(눌리는 깊이)를 아주 얇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주로 노트북 키보드에 쓰인다. 


키감 플라스틱 구조물이 보통 멤브레인 키보드에는 없는 구분감(걸리는 느낌)을 내 준다. 짤깍거리는 특유의 소리가 특징이다.


장점 두께가 얇은 만큼 휴대가 용이하며 소음 역시 매우 적다. 특유의 키감 역시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나 좋아하는 이들은 기계식이나 무접점보다도 좋아한다. 


단점 얇은 플라스틱 부품이 핵심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다른 방식의 키보드에 비해 쉽게 깨지는 경향이 있다. 스트로크를 많이 짧게 만든 제품의 경우 장시간 타이핑 시 손가락이 아프다고도 한다. 아무래도 기계식과 멤브레인 사이 애매한 포지셔닝과 그에 따라 제품군 자체가 적다는 점도 단점이라면 단점.


추천 레노버 사의 그 유명한 씽크패드(Thinkpad) 노트북의 자판만 떼어다 만든 울트라나브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다. 값은 다소 나가지만 로지텍 k750과 k800, 붉은 LED를 지원하는 아이락스의 k50e도 솔리드하다. 


덧. 변종으로 애플이 2015년 발표한 버터플라이 스위치가 있다. 플라스틱 구조물이 X자가 아니라 나비 날개처럼 키캡을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극단적으로 얕은 스트로크를 가지고 있으며 러버돔 대신 스테인리스 돔을 사용하기 때문에 금속을 두드리는 느낌이 난다. 맥북, 아이패드 키보드 등 애플 제품에만 탑재되기 때문에 따로 서술하지는 않겠다.



3. 플런저 키보드


한성 GTune MPF60 타건 영상. 출처 유투브 김민석 채널


역시 멤브레인 키보드의 또다른 파생형이다. 키캡과 러버돔 사이에 플런저라고 하는 또다른 부품을 집어넣어 찰칵거리는 소리와 구분감을 내준 것이 특징이다. 제조사 별로, 또 제조방식 별로 키감이나 소리가 천차만별이나 대체로 기계식의 청축에서 소리가 조금 빈 것 같은 타건음을 낸다. 주로 멤브레인을 쓰자니 반응이 별로일 것 같고 기계식 키보드를 쓰자니 가격이 부담스러운 PC방에서 많이들 들여놓는다. 보통 멤브레인과는 확연히 다른 찰칵거림에 아, 이게 기계식인가 보다, 하고 착각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키감 멤브레인과도 다르고 기계식 키보드와도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청축이나 갈축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먹먹한 느낌.


장점 기본적으로 멤브레인이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다. 멤브레인과는 분명히 차별화된 타건감을 가지고 있으며 화려한 LED, 비키 스타일의 디자인도 많다. 


단점 멤브레인의 몸으로 기계식의 키감을 노렸지만 결국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키감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요즈음 들어 카일, 오테뮤 등을 위시한 유사 체리 축들의 활약으로 기계식 키보드의 가격대가 많이 낮아졌기 때문에 가격적인 경쟁력조차 점점 낮아지고 있다.


추천 게임용이라면 레인보우 LED를 가진 앱코 해커 K300가 무난하다. PC방의 플런저 키보드 대란을 이끈 비프렌드 아이매직의 GKEYBOARD2 제품군도 좋다. 



다음 편에서 계속. 이제 본격적으로 제일 핫한 기계식 키보드를 다룰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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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드라이버(2017)
2017. 9. 15. 10:00 - 북북서


<베이비 드라이버>, 2017, 에드가 라이트

사진출처 다음영화


할리우드에서는 한 해에 600편을 넘나드는 영화가 제작된다. IMDB에 따르면 2012년까지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무려 44,000편에 달한다. 비교의 대상을 같은 이야기 예술인 희곡이나 소설, 연극에까지 넓히면 그 숫자는 거의 체감상의 무한에 수렴한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런 시점에서 흔하고 뻔하지 않은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대부분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 첫째는 이미 본 적이 있는 이야기를 높은 완성도와 진정성으로 밀어붙이는 정공법이다. 둘째는 익숙한 재료들을 색다르게 배합한 다음 거기에 자신의 개성 한 방울을 넣어 차별화를 꾀하는 것이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전형적인 후자다. 그리고 꽤나 성공적인 후자의 예이기도 하다. 


<베이비 드라이버>, 사진출처 IMDB


이야기의 큰 얼개 자체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주인공 베이비(이름이다)는 범죄자들을 무사히 도주시켜주는 운전사다. 천재적인 운전 솜씨와 기억력을 자랑하며 이제껏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행운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럴수가, 사실 그는 범죄자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선한 영혼과 여린 양심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뇌하는 그의 앞에 운명의 여인이 나타나고... 그녀와 함께 도망치려는 그의 앞을 가로막는 범죄자들! 카체이스! 총격! 액션! 그리고 폭발! 쾅쾅쾅. 


하지만 <베이비 드라이버>는 이런 정석적인 전개 속에 뮤지컬이라는 소장르를 집어넣음으로서 이야기에 전혀 다른 색감을 입히는 데 성공한다. 뮤지컬이라 해서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합창을 시작하거나 하지는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 대신 주인공 베이비는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 어렸을 적 당한 사고의 후유증으로 귀에 이명이 들리기 때문이란다. 그의 아이팟에서 나오는 음악이 바로 <베이비 드라이버>의 배경음악이다. 게다가 감독 에드가 라이트는 등장인물들의 동작과 액션을 이 음악에 따라 배치하는 묘기를 부려 놓았다. <베이비 드라이버>의 편집과 호흡은 음악에 맞춰 이루어지며 이야기 내의 액션과 전개가 다시 배경 음악에 영향을 미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초반부의 커피 배달 시퀀스이다. 대사, 효과음,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음악과 절묘하게, 그리고 촌스럽지 않게 맞아떨어지며 말 그대로 뮤지컬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안겨 준다(이 시퀀스는 28번 재촬영되었으며 그 중 21번째 장면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캐릭터들을 활용하는 방식 역시 멋지다. 이야기의 큰 틀 자체는 상투적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위에서 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캐릭터를 몇 명 배치시킨 후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은 흥미롭다. 크게 봤을 때는 분명 뻔한 전개지만 충분한 속도감과 의외성의 결과로서 제시되니 그 설득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제이미 폭스의 연기가 좋다. 중반부의 긴장감은 거의 그가 자아낸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주인공인 얀셀 앨고트 역시 자연스럽고 케빈 스페이시는 뭐, 항상 그렇듯 케빈 스페이시스러운 연기를 한다. 특히 이번 캐릭터는 거의 각본가가 캐릭터 이름을 케빈 스페이시로 놓고 각본을 쓴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케빈 스페이시스러운 캐릭터다. 딱 <21>의 케빈 스페이시를 생각하면 되겠다.


 <베이비 드라이버>, 사진출처 IMDB


하지만 내내 유쾌하게 질주하던 <베이비 드라이버>는 후반부에 이르러 그 관성을 다소 잃는다. 갈등이 표면화되고 격렬한 액션이 터져나옴에도 이야기는 장황해지고 늘어진다. 지나치게 편리한 게 아닌가 싶은 전개가 몇 군데 있으며 그를 해결하기 위해 캐릭터들이 조금 무너지는 듯한 느낌조차 든다. 영화의 메인 컨셉이라 할 만한 자동차 액션의 까리함도 분명 초반부에 비해 덜하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단순한 총격전은 이미 많은 영화에서 그 한계를 탐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베이비 드라이버>는 결말에 이르러 이런 산만함을 수습해내는 능력을 보인다. 이런 류의 액션 영화에서 보기 힘든 우직함으로 이야기의 끝을 깔끔히 돌파해내는 것이다. 영리한 반전이나 기지 넘치는 전개 대신, 그냥 논리적이고 정직한 결말로 마무리를 짓는다. 적어도 이런 종류의 케이퍼물에서 흔히 애용하는 캔디랜드식 결말은 아니다. 뻔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예측할 수 없는 결말로 치달았어도 좋았을 것 같기는 하지만 뭐, 지금의 정공법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름대로 로맨틱하기도 하고.


<베이비 드라이버>, 사진출처 IMDB


추천

신선한 자동차 액션을 보고 싶으신 분

음악적인 액션 영화가 보고 싶으신 분

로맨티스트


비추천

사랑을 외치는 애들이 눈꼴시우신 분

장황한 후반부를 견디기 싫으신 분

참신하고 영리한 이야기를 원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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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의 마지막 연설
2017. 9. 11. 17:20 - 북북서

역사가 그 방향을 바꾸는 순간을 본 적이 있는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역대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이다. 집권 초기엔 그래도 국가 경제를 신경쓰고 자본주의 진영에 화해의 제스쳐를 보내는 등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으나, 북한과 중국을 방문하고는 그만 독재자 뽕에 취해 흑화해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적인 악행을 몇 가지 열거하자면 우선 자신과 영부인 엘레나의 생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며 스스로를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길기도 하다)'라 칭하는 우상화 정책을 폈다. 공무원과 군인들에게는 자신의 자서전을 강매했으며 자신의 작은 키(165cm)에 컴플렉스가 심한 나머지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과는 결코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한다. 경제가 파탄나 국가의 채무가 130억 달러를 넘기고 국민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도 수도 부쿠레슈티의 1/3을 차지하는 초거대 왕궁 '인민 궁전'을 짓는 사치를 부리는가 하면, 자신의 애완견에게는 TV와 전화기가 딸린 전용 침실과 개밥을 미리 먹어보는 전속 기미상궁(...)을 하사하는 엽기적인 짓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국고 바닥을 긁고 있는 상황에서 대대적인 인구 증가 정책을 펴 전국의 고아원만 북적거리게 만든 것은 유명하다. 


또한 인간성 자체도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타인에 관한 배려는 커녕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도 부쿠레슈티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생존자 구조 작업 때문에 수도의 복구가 더뎌진다며 잔해를 그냥 불도저로 밀어버리라 명령, 생존자들이 있음이 분명함에도 무너진 잔해를 통째로 으깨버린 사건은 유명하며, 아들이 잠시 해외로 나간 사이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여자를 병사들을 시켜 집단으로는 강간하고는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을 아들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 등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이 끔찍한 일들도 서슴지 않았다. 


이 지독한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몰락은 루마니아 서쪽의 도시 티미쇼아라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인종간 갈등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헝가리계 목사 퇴케시 라슬로가 불합리하게 체포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라슬로의 체포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나자 차우셰스쿠 정부는 군대와 헬리콥터, 탱크까지 동원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다수의 시위대를 사살한다. 시민과 노동자들은 이 무력진압에 격렬히 반발하였으나 차우셰스쿠 정부는 개의치 않았다. 티미쇼아라에는 계엄령이 내려졌으며 성당에서 "깨어나라, 루마니아여!"라 노래하던 대학생 30명은 군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몰살당한다. 이때 시위대와 군대의 충돌이 있었던 곳은 잔해와 불길, 핏자국으로 흡사 전쟁터와도 같은 모습이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하지만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차우셰스쿠의 폭정에 이를 갈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티미쇼아라로 몰려들었고, 이 시점에서 시위대의 숫자는 이미 10만 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이상한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이미 몇 차례의 소요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한 바 있는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로 이 모든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그에게 제대로 된 보고가 들어가지 않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12월 21일, 차우셰스쿠는 늘 하던 대로 수도의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들끓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자신의 권위를 다시 한 번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출처 Avocatul Poporului 유투브 채널


시간이 없다면 2분 30초부터 보자. 평소처럼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연설을 하는 차우셰스쿠. 처음에는 모든 것이 평소와 같다. 그러나 그는 곧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살아있는 신이며 인민의 아버지라고 주창해왔다. 국민들을 탄압했으며 감시했고 자신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누군가 야유를 하기 시작한다. 군중은 하나 둘씩 그 소리에 동참한다. '티미쇼아라!'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휘파람을 불고 미친듯이 소리를 지른다. 2분 41초,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차우셰스쿠의 얼굴을 보자. 간신히 한 손을 들고 "여러분(Hallo)"이라고 외쳐 보지만 이미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바로 이 순간이다. 차우셰스쿠의 시대가 무너진 순간이자 루마니아 혁명이 이루어진 순간이 바로 저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금씩 조금씩 쌓여온 무언가가 마침내 역치에 도달해 둑을 터뜨리고 사방으로 질주하는,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광경은 루마니아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차우셰스쿠는 급히 자리를 피한다. 그러나 이미 그의 시대는 끝난 뒤였다. 시위를 진압하라고 정규군을 보내 보지만 이미 그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 없는 군대는 오히려 시위대에 합류해 차우셰스쿠에게 총구를 겨눈다. 다음날인 22일 정오, 차우셰스쿠는 그의 아내 엘레나(역시 각종 악랄한 짓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각종 증언에 따르면 차우셰스쿠보다 더 잔인했다고도 한다)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도주를 시도하나 헬리콥터 조종사조차도 헬리콥터를 비상착륙시킨 후 도망가버린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몇 명의 경호원과 함께 시민들의 차를 빼앗아 타 가며 필사적으로 도망치지만 결국 23일,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혁명군에 붙잡히고 만다. 


그렇게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8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오후 4시에 총살당한다. 아내 엘레나와 함께였으며, 그의 마지막 연설로부터 불과 4일 후의 일이었다. 동구권 최악의 독재자는 그렇게 허무한 끝을 맞았다.


총살당하는 차우셰스쿠 부부. 사진출처 stillunfold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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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10. 02:26 - 북북서


<그것>, 안드레스 무시에티, 2017


비가 어둡게 내리는 날이다. 소년은 노란 우비를 입고 밖으로 나간다. 길가에 흐르는 빗물에 형이 만들어준 종이배를 살짝 띄운다. 와, 뜬다. 소년은 신이 나서 흘러가는 종이배를 따라 뛰어간다. 그러나 그만 앞에 있는 표지판을 보지 못하고 부딪쳐 넘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 사이 종이배는 그만 하수구로 흘러들어가 버린다. 소년은 일어나 망연자실하게 하수구를 들여다본다. 그러나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 새하얀 얼굴을 한 삐에로다. 한 손엔 소년의 종이배를 들고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꿈인가? 소년은 혼란스럽다.


<그것>은 스티븐 킹의 소설 <그것(it)>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영상화로는 1990년에 제작된 미니 시리즈에 이어 두 번째다. 첫 번째 페니와이즈는 <록키 호러 픽쳐 쇼>의 팀 커리였다. 이번엔 빌 스카스가드다. 들리는 말로는 그의 연기가 너무나 소름끼치는 나머지 아역 배우들이 정말로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단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과장이 섞였겠지만, 뭐 그런대로 속아 넘어가 줄 만한 것 같다. 빌 스카스가드의 페니와이즈는 성공적이다. 얼굴은 섬뜩하고 목소리는 기괴하며 행동거지엔 동화적인 크리피함이 가득하다. 게다가 그에겐 팀 커리가 누리지 못했던 컴퓨터 그래픽의 축복까지 있지 않은가(도리도리춤을 비롯해 조금 과한 장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덕분에 빌 스카스가드의 페니와이즈는 어느 정도는 보통 삐에로 같았던 팀 커리의 페니와이즈와 달리 온갖 징그러운 변신과 환각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아이(와 관객)들을 괴롭힌다. 


<그것>, 사진출처 imdb


하지만 정말로 너무나 무서워 혼자 샤워하러 들어가기가 꺼려질 정도의 호러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물론 무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여러 가지 소장르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호러 시퀀스가 준비되어 있으며 15세 관람가가 맞나 싶은 묘사도 종종 등장한다. 상기했듯 페니와이즈는 그 생김새부터가 너무 소름끼치게 생겼고(이건 내가 삐에로를 무서워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위에 붙인 사진을 잘 못 쳐다보겠다) 호러 시퀀스의 연출이나 구성 역시 무척 좋은 편이지만, 막상 그 무서움은 조금 약한 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스티븐 킹의 원작 <그것> 자체가 자극적인 무서움을 추구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의 주인공은 빌 덴브로를 위시한 "루저 클럽(Loser's Club)"의 아이들이다. 이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페니와이즈의 표적이 된다. 아이들은 도망가고 비명을 지르며 겁이 질려 운다. 서로에게 심한 말을 하고 등을 돌려 고립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결국 다시 일어서서 페니와이즈에게 맞선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다. 말하자면 개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악에 맞닥뜨린 아이들의 이야기며,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그 악과 맞서 싸우며 그 악을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지에 관한 일종의 고전 모험극이자 성장 드라마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초점은 철저히 아이들에게 놓여 있다. 감독은 일곱 명이나 되는 이 아이들에게 각각의 개성과 배경, 성격을 일일히 부여하는 수고를 들여가며 이들의 캐릭터를 구축한다. "루저 클럽"은 각자 가정폭력, 인종차별 등 갖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고통받는 이들이며 영화는 그 고통의 묘사에 페니와이즈와 비슷한 양의 화면을 배분한다. 왜? 그만큼 이들의 단결이 이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페니와이즈는 물론 지독히도 소름끼치는 괴물이며 호러를 주도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이들이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을 실체화한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능한다. 페니와이즈는 극복될 때에 의미가 있는 괴물이며 이는 <그것>이 전체적으로 동화나 우화스러운 분위기를 띄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 사진출처 imdb


정말 무서운 공포 영화를 보려고 했다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그것>은 끔찍한 괴물 영화가 아니다. 그런 끔찍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억지로 끌어다 붙이자면 정치적인 요소를 제거한 삐에로 버전 <괴물>과도 조금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성장극으로서의 완성도는 어떤가?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간혹 지나치게 배경음악이 튄다거나 주인공이 너무나 용감한 나머지 답답한 부분이 있다거나 하는 사소한 허점들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멋진 이야기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풍기는 고전 영화스러운 바이브 역시 80년대의 배경과 잘 맞아 떨어지며 이런 드라마적인 요소를 강화한다. 여기서 호러 영화는 무서워야 호러로써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이제껏 단순한 자극을 위해 빈약한 이야기를 지어다 붙인 수많은 영화들을 떠올려 보자. 제대로 된 이야기가 선행한 뒤 그 위에 얹힌 호러 영화라니, 대체 얼마 만인가? 


<그것>, 사진출처 imdb


추천

아이들의 성장물을 좋아하시는 분

삐에로가 무서우신 분

스티븐 킹의 팬이신 분


비추천

정석적인 호러 영화가 보고 싶으신 분

삐에로가 너무너무 무서우신 분

하지 말란 걸 하는 아이들이 너무 답답하신 분


덧. 스티븐 킹의 원작은 과거 어렸을 적의 루저 클럽과 어른이 된 루저 클럽의 두 시점이 병행해서 전개된다. 이번 영화 <그것>은 철저히 아이들의 이야기로만 전개되며 따라서 영화가 끝난 뒤 사실 이것은 챕터 1이었읍니다, 하고 변명한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될 챕터 2를 기다려 보자. 


덧2. (스포일러?) 원작 후반부 충격적이었던 그 장면, 루저 클럽 아이들이 6:1로 섹스를 하는 장면은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원작 기준으로도 너무 극단적인 장면이었으니 혹시 영상화되리라 기대한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아이들의 나이를 생각하자. 뭐 스티븐 킹은 루저 클럽이 하나가 되면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메타포라고 둘러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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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연금술사, 실사 영화
2017. 9. 9. 00:30 - 북북서


<강철의 연금술사>, 아라카와 히로무, 사진출처 다음 책


<강철의 연금술사>는 완벽한 만화였다. 세계관은 독창적이었고 스토리 전개는 숨쉴 틈이 없었으며 저마다의 소망을 위해 발버둥치는 캐릭터들을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조연인 줄 알았던 인물들이 각각의 서브 플롯으로 갈라져 나갔다가 다시 새로운 역할과 캐릭터성을 가지고 메인 플롯으로 환원하는 구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큰 주제의식에 기여함과 동시에 다각도의 층위를 형성하는 섬세함을 보라. 이 얼마나 치밀한 솜씨인가.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요소가 하나로 묶여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는 순간의 힘은 또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가. 착한 주인공이 나쁜 악당을 때려잡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우정과 정의로 뭉뚱그려버리는 여타 일본식 소년 만화에 지친 이들에게 <강철의 연금술사>는 놀랍도록 경이로운 만화였다.


그리고 올해 12월 1일, <강철의 연금술사> 실사 영화가 개봉한단다. 작년 쯤이었나, 제작 결정이 났다는 소식은 들은 기억이 난다. 아마 알폰스는 전부 CG로 그릴 거라고도 했었다. 딱히 걱정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람의 검심>의 선례가 있기도 하고 2017년이나 되었으니 뭐 일본도 알아서 잘 하겠지, 뭐 그 정도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늘 우연히 그 포스터라고 나온 것들을 봤다.




<강철의 연금술사>, 사진출처 <강철의 연금술사> 영화 공식 트위터(일본)


포인트 : 

1) 미칠듯이 오그라드는 엔비 

2) 뭐라 형용할 말을 찾기 힘든 글러트니

3) 아무리 봐도 부직포로 만든 것 같은 윈리의 스패너

4) 마지막 포스터의 참상을 왼쪽에서 아련하게 바라보는 <곡성>의 악마 아저씨 쿠니무라 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어쩌면 <강철의 연금술사>는 일본에선 그다지 인기가 없었던 건 아닐까. 원작자 아라카와 히로무는 대체 감독에게 무슨 원한을 산 것인가. 혹시 술에 취해 그만 소싯적 홋카이도에서 곰을 때려잡던 솜씨로 감독 죽빵이라도 후린 건 아닐까. 쿠니무라 준은 또 무슨 약점을 잡힌 것인가. 옷들이 너무 저가 코스프레 같은 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제외하더라도 포스터에 아련히 감도는 이 세기말적인 감성은 대체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재미있을 가능성이 5% 정도는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영화를 보러 가야 하는가. 아, 정말로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게 가장 효율적인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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