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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 종의 전쟁(2017)
2017. 9. 3. 00:50 - 북북서


<혹성탈출 : 종의 전쟁>, 맷 리브스, 2017

사진출처 다음영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사실 조금 뜬금없는 영화였다. 때는 2011년도, <블랙 스완>이 상반기를 장악하고 하늘엔 아이언맨과 토르가 날아다니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개막을 알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꼬질꼬질한 원숭이가 한 마리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무려 38년이나 전에 끝났던 시리즈의 부활을 선언하며 말이다!(팀 버튼의 2001년도 <혹성탈출>은 영화 프랜차이즈라기보다는 원작 소설의 재 영화화에 가까우니 제외하도록 하자) 한때 덕후들 꽤나 거느리던 시리즈였다고는 하지만 왜 굳이 이제와서? 게다가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의 어감은 요즘 시대 기준으로는 어떤 B급 SF의 바이브까지 풍기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게 상당히 재밌었던 거다. 고작 한 마리 원숭이라고 생각했던 시저가 마지막에는 거의 피흘리는 스파르타쿠스처럼 보였다. B급 SF는 커녕 생각외로 너무 장엄하고 애틋하고, 얼핏 직선적인 스토리를 팽팽하게 몰아대는 힘이 마치 스필버그 영화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CG로 그려낸 유인원들은 대부분의 인간 배우들보다도 자연스러우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심지어 3년 뒤인 2014년 개봉한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은 더욱 훌륭했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혹성탈출> 시리즈의 유인원들은 인간의 안티테제임과 동시에 인간 사회의 은유로서 기능한다. 인간과 함께 비춰질 때는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다운 주체로서 소위 "인간성"(와, 인간탈트)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유인원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한 이후부터는 인간 사회의 갈등과 문제점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기도 한 것이다.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에서 유인원의 리더가 된 시저와, 그의 아픈 고뇌에도 불구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다층적이다. 조금 오버하자면 거의 그리스 비극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혹성탈출 : 종의 전쟁>, 사진출처 imdb


그리고 그 주제와 이야기를 이어받아 이 트릴로지를 마무리하는 것이 바로 이번 <혹성탈출 : 종의 전쟁>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시저와 그의 유인원 무리는 상당히 암울한 지경에 처해 있다. 군인들은 계속해서 유인원들을 공격하며 사상자와 배신자가 넘실거린다. 시저는 코바 사건 이후 굳건하던 멘탈이 다소 불안정해졌고 군인들을 이끄는 "대령"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상황에 가족과 인간의 여자아이, 그리고 인간 측 사정이 얽히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스파르타쿠스>였다. <혹성탈출 : 종의 전쟁>은 영화 중간에 아예 "Ape-calypse Now"라 휘갈겨 쓰인 그래피티가 등장하기까지 하는 만큼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기독교적 메시아인 시저를 탄압하는 맥컬러 대령은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의 레퍼런스임이 거의 분명해 보이는데, 플롯에 있어 그의 역할이나 최후를 맞는 방식이 특히 그렇다. 


그리고 이 맥컬러 대령(사실 이름은 군복에만 써 있고 영화 내내 그냥 "대령(The Colonel)"이라고만 불린다) 이야말로 시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써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이다. 그는 커츠 대령이고 모세를 탄압하는 파라오이며 동시에 목적을 추구하는 방법론에서 시저와 대조를 이루는 안타고니스트다. 각자 한 집단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두 캐릭터가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마지막에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된 뒤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전개는 아이러니하며 그만큼 멋지다. 새로운 <혹성탈출> 시리즈가 좋은 이유는 이처럼 한 영화에 여러 가지 층위가 쌓여 있다는 점인데, 이는 보다 접근을 가능케 하며 보고난 후가 보는 순간만큼 재밌는 영화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텐션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나쁜 원숭이(Bad Ape)나 상징하는 바가 명확한 암살자(...) 노바 역시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소모되지 않으며 이야기에 양감을 부여한다.


<혹성탈출 : 종의 전쟁>, 사진출처 imdb


이야기를 묵직하게 밀고 나가는 시리즈 특유의 힘은 여전히 건재하다. 시저를 모션 캡쳐한 앤디 서키스를 필두로 한 배우들의 연기 역시 흠잡을 곳이 없어 화면 내내 고요한 듯 팽팽한 에너지가 가득하다. 다만 <혹성탈출 : 종의 전쟁>은 아쉽게도 그 만듦새에 있어서는 앞의 두편보다 조금 약한 편이다. 감정선이 충분히 쌓이기 전에 다소 급하게 이어붙여진 장면들이 보이며(루카와 노바의 벚꽃 신이 대표적이다) 결말부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 역시 성서와 모세의 은유인 점을 고려하더라도 조금 지나치게 편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종의 전쟁(원제로는 War)"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면서도 중후반부 유인원들의 목적은 전쟁이 아닌 탈출과 생존인 점도 미묘한 부분이다. 조금 더 스케일이 큰 무언가를 기대했던 관객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진화의 시작>에서 발단하고 <반격의 서막>에서 위기에 다다른 시저의 여정은 <종의 전쟁>에서 절정과 결말을 맞는다. 무수한 희생과 고뇌를 이어붙여 다다른 마무리이다. 그래서 그 끝은 어땠느냐 하면, 나무랄 데 없는 것 같다. 물론 참신한 반전은 없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끝까지 애매한 기교나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정공법이고, 견실하다. 어떻게 이 난데없이 튀어나온 시리즈가 이렇게 우직할 수 있었을까. 38년 전에 완결되었던 영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리즈를 다시 만드는데 불안하진 않았을까? 그만큼 자신들이 가진 소재에 확신이 있었던 걸까. 난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로써 새로운 <혹성탈출> 트릴로지는 21세기 가장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다. 시리즈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나오면 두근거리며 챙겨봐야 할 또 하나의 프랜차이즈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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