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2010, 에드가 라이트
사진출처 IMDB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Scott Pilgrim vs. the World)>는 한국계 캐나다인 만화가 브라이언 리 오말리의 그래픽 노블 <스콧 필그림>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스콧 필그림은 아마추어 락 밴드의 베이시스트다. 그런데 세상에, 어느날 그의 앞에 너무나도 아리따운 "운명의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라모나 플라워스다. 그런데 이럴수가, 그녀와 사귀려면 그녀의 일곱 전남친을 모조리 싸워 물리쳐야 한단다.
눈치채셨는가? 이건 영화의 플롯이 아니다. 이건 게임의 화법이다. 라모나 플라워스는 공주고 일곱 전남친은 차례로 깨나가야 하는 보스들이다. 원작 만화 <스콧 필그림>은 바로 이런 만화다. 게임과 음악으로 대표되는 각종 대중문화의 패러디가 난무하며 미국 코믹스와 일본 망가의 센스가 유쾌하게 뒤섞인, 소위 병맛 문화에도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원작의 이런 성격은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사진출처 IMDB
그래서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는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하다. 각종 그래픽과 나레이션은 8비트의 레트로 감성으로 출력되며 이야기의 전개는 나사가 서너개 쯤 풀려있다. 물리법칙은 자연스럽게 무시되며 그것을 설명하려는 어떤 시도도 (당연히) 하지 않는다. 게임을 위시한 각종 서브컬쳐의 레퍼런스와, 그에 힘입은 컬트적인 코드의 개그를 거의 난사하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느 순간은 그 뻔뻔함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영화의 개그는 꽤 좋다. 마이클 세라 특유의 미묘하게 어색한 연기와도 시너지가 좋고,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센스가 좋다. 이 영화가 노려야 하는 관객층, 즉 "서브컬쳐에 전반에 어느정도 이해도가 있으면서 유치함을 견뎌낼 수 있는" 이들의 취향을 잘 관통하고 있다. 저 얇은 관객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엄청 웃으면서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상기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가 그리 매끄럽게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선 욕심이 조금 지나쳤다. 영화는 유쾌한 긱 무비를 넘어서 아마도 다른 소장르 몇 가지를 포섭하려 했던 듯 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음악 영화이고, 그 다음은 성장물이다. 분명 멋진 시도긴 하다. 성공했더라면 영화의 완성도가 한 단계 높아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물은 실패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한다. 음악 영화로서의 기반은 의외로 나쁘지 않으나 그것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려 줄 좋은 음악이 부족하다. 성장물로서는 더욱 허술한데,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러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발견하는 순간 영화 스스로가 모든 텐션과 긴장을 내팽개쳐버리며 포기해버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도 자체가 영화의 어떤 자기방어였던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일곱 전남친을 모두 싸워 이긴다는 이야기의 골격 자체가 영화라는 매체가 다루어내기는 조금 길고 반복적이다. 만화나 게임에서 보스가 많은 것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게임은 스테이지간 개성만 잘 배분해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만화의 경우는 긴 시간을 들여 공개되는 장르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길어야 2시간 안팎인 이야기에서 일곱 명의 보스를 모두 다루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독 에드가 라이트 역시 이 문제를 자각하고 있었던 듯, 보스마다 전투의 방식과 구도를 달리 하는 등 노력하나 결국 후반부 일본인 쌍둥이 파트에 이르게 되면 누적된 피로감이 상당해진다. 쉽게 말해 물린다는 이야기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는 그 장단점이 명확한 영화다. 노리는 관객층은 한정적이며 만듦새의 측면에서 여러 굵직한 단점을 안고 있다. 2010년 개봉 당시 흥행 성적이 참담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개봉조차 되지 못했다. 현실에 두 발을 디딘 진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재앙과도 같은 영화지만, 대신 취향에만 맞는다면 이처럼 풍성한 종합선물세트도 없을 거다. 가끔은 이렇게 발놀림이 가벼워 날아다닐 것만 같은 영화도 필요한 법이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사진출처 IMDB
추천
레트로 게이밍과 서브컬쳐에 이해도가 있으신 분
유치함을 견딜 수 있으신 분
병맛 코드를 좋아하시는 분
비추천
레트로 게이밍을 모르시는 분
작품성 있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딱 질색이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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