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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
2017. 8. 5. 18:47 - 북북서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2010, 에드가 라이트

사진출처 IMDB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Scott Pilgrim vs. the World)>는 한국계 캐나다인 만화가 브라이언 리 오말리의 그래픽 노블 <스콧 필그림>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이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스콧 필그림은 아마추어 락 밴드의 베이시스트다. 그런데 세상에, 어느날 그의 앞에 너무나도 아리따운 "운명의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라모나 플라워스다. 그런데 이럴수가, 그녀와 사귀려면 그녀의 일곱 전남친을 모조리 싸워 물리쳐야 한단다.


눈치채셨는가? 이건 영화의 플롯이 아니다. 이건 게임의 화법이다. 라모나 플라워스는 공주고 일곱 전남친은 차례로 깨나가야 하는 보스들이다. 원작 만화 <스콧 필그림>은 바로 이런 만화다. 게임과 음악으로 대표되는 각종 대중문화의 패러디가 난무하며 미국 코믹스와 일본 망가의 센스가 유쾌하게 뒤섞인, 소위 병맛 문화에도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원작의 이런 성격은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사진출처 IMDB


그래서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는 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하다. 각종 그래픽과 나레이션은 8비트의 레트로 감성으로 출력되며 이야기의 전개는 나사가 서너개 쯤 풀려있다. 물리법칙은 자연스럽게 무시되며 그것을 설명하려는 어떤 시도도 (당연히) 하지 않는다. 게임을 위시한 각종 서브컬쳐의 레퍼런스와, 그에 힘입은 컬트적인 코드의 개그를 거의 난사하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느 순간은 그 뻔뻔함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영화의 개그는 꽤 좋다. 마이클 세라 특유의 미묘하게 어색한 연기와도 시너지가 좋고,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센스가 좋다. 이 영화가 노려야 하는 관객층, 즉 "서브컬쳐에  전반에 어느정도 이해도가 있으면서 유치함을 견뎌낼 수 있는" 이들의 취향을 잘 관통하고 있다. 저 얇은 관객층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엄청 웃으면서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상기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가 그리 매끄럽게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선 욕심이 조금 지나쳤다. 영화는 유쾌한 긱 무비를 넘어서 아마도 다른 소장르 몇 가지를 포섭하려 했던 듯 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음악 영화이고, 그 다음은 성장물이다. 분명 멋진 시도긴 하다. 성공했더라면 영화의 완성도가 한 단계 높아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과물은 실패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한다. 음악 영화로서의 기반은 의외로 나쁘지 않으나 그것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려 줄 좋은 음악이 부족하다. 성장물로서는 더욱 허술한데,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러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을 발견하는 순간 영화 스스로가 모든 텐션과 긴장을 내팽개쳐버리며 포기해버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도 자체가 영화의 어떤 자기방어였던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일곱 전남친을 모두 싸워 이긴다는 이야기의 골격 자체가 영화라는 매체가 다루어내기는 조금 길고 반복적이다. 만화나 게임에서 보스가 많은 것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게임은 스테이지간 개성만 잘 배분해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만화의 경우는 긴 시간을 들여 공개되는 장르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길어야 2시간 안팎인 이야기에서 일곱 명의 보스를 모두 다루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독 에드가 라이트 역시 이 문제를 자각하고 있었던 듯, 보스마다 전투의 방식과 구도를 달리 하는 등 노력하나 결국 후반부 일본인 쌍둥이 파트에 이르게 되면 누적된 피로감이 상당해진다. 쉽게 말해 물린다는 이야기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는 그 장단점이 명확한 영화다. 노리는 관객층은 한정적이며 만듦새의 측면에서 여러 굵직한 단점을 안고 있다. 2010년 개봉 당시 흥행 성적이 참담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개봉조차 되지 못했다. 현실에 두 발을 디딘 진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재앙과도 같은 영화지만, 대신 취향에만 맞는다면 이처럼 풍성한 종합선물세트도 없을 거다. 가끔은 이렇게 발놀림이 가벼워 날아다닐 것만 같은 영화도 필요한 법이다.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 사진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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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게이밍과 서브컬쳐에 이해도가 있으신 분

유치함을 견딜 수 있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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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성 있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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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 홈커밍(2017)
2017. 8. 4. 21:08 - 북북서


<스파이더맨 : 홈커밍>(2017), 존 왓츠, 사진출처 다음영화


벌써 세 번째 스파이더맨이다. 감독의 고뇌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와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부작이 한 30년 전 영화였다면 모를까, 아직 모두가 또렷히 기억하는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신선하게 찍는다는 말인가? 피터가 거미에 물리고 메리 제인을 짝사랑하고 엉클 벤이 죽고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르고...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수를 써야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또 식상하지 않게 보여줄 수 있을까... 게다가 이번엔 아이언맨도 등장시켜야 되는데... 덕후들 무서운데... 여기서 한끗 잘못하면 그냥 X되는건데... 아 X발...


그리고 아마도 이런 생각의 흐름 어디쯤에서 감독은 그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흑화해버린 것 같다. 무슨 소리냐고? <스파이더맨 : 홈커밍>에는 없다. 엉클 벤도 없고 쫄쫄이의 기원도 없다. 오스코프도 없고 오스코프가 없으니 해리 오스본도 없고 심지어는 피터가 거미에 물리는 장면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없다. 감독은 그냥 모조리 스킵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피터는 이미 건물 사이를 날아다닌지 좀 됐고 <시빌 워>건으로 토니 스타크와도 면식이 있다. 솔직히 조금 감탄했다. 거칠고 과감하고 멋진 선택이다. 식상한 이야기란 바꿔 말하면 모두가 이미 아는 이야기다. 모두가 이미 아는 이야기라면? 그냥 너네 어차피 알지? 하고 생략해버리면 되는 거다!


<스파이더맨 : 홈커밍>의 파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빌 워>에서 잠시 엿보였듯 이번 스파이더맨은 역대 스파이더맨 중에 가장 어리고 가장 가벼우며 가장 애샛기미가 넘친다.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플래쉬도, 메리 제인도, 네드 리즈도 모두 파격적으로 재구축되었다. 덕분에 <스파이더맨 : 홈커밍>은 이제까지의 스파이더맨들과 완전한 차별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부작이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와 같은 골격에 다른 근육과 살을 쌓아올렸다면, 그리고 그래서 간혹 기시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면, <스파이더맨 : 홈커밍>은 완전히 자유롭다. 다만 다소 지나친 감이 없다면 거짓말인데, 왜냐면 히어로 영화란 원래가 절대로 원작의 팬층을 무시할 수가 없는 장르가 아니던가. 이토록 바뀌어버린 캐릭터들, 그중에서도 특히 메리 제인을 다루는 방식은 어쩌면 원작의 팬들에게 조금 배신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스파이더맨 : 홈커밍>, 사진출처 imdb


그러나 어쨌든 이런 과정을 통해 <스파이더맨 : 홈커밍>은 필요없는 모든 족쇄를 덜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들이 줄어드니 감독의 자유는 한없이 커진다. 그 결과, 영화는 날렵하고 매끈하며 시종일관 호감이 간다. 이야기의 완급을 잡아주는 개그도 잘 짜여져 있으며, 이야기의 주제의식에도 소홀하지 않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가 우연히 얻은 능력을 계기로 영웅으로써의 자아와 책임을 자각해나가는 이야기라면, <스파이더맨 : 홈커밍>은 어리고 의욕이 앞서는 소년이 성숙해가는 데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자칫 산만하게 붕 뜰 수도 있었던 아이언맨을 이 주인공이 성숙해가는 플롯의 보조역으로 활용하는 발상은 그저 영리하다고 하겠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첫째로, 등장이물들의 나이대가 어려지며 샘 레이미와 마크 웹의 시리즈에 비하면 많이 영화 자체가 많이 산만해졌다. 정신없음에 면역이 없는 사람이라면 조금 견디기 힘들 수도 있겠다. 둘째로, 스파이더맨이 시종일관 날아다니는 영화임에도 의외로 클라이맥스의 액션은 조금 심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드물게도 생계형 빌런인 벌쳐가 상당히 다면적이고 인상적인 악역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뭔가 충분히 치고박고 싸웠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마지막 전투 시퀀스가 벌어지는 배경의 지형상 스파이더맨의 수직적인 액션이 빛을 발하기 애매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랬다면 배경을 적절히 바꾸는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는 빈틈없이 잘 만든 히어로 영화했다. 초기 스파이더맨을 반영한 탓에 다소 어두웠으나 그만큼 진지했고 동시에 지나친 우울함으로 향하지 않는 균형감각 또한 탁월했다. 안타깝게도 <스파이더맨 3>은 제작사 소니의 간섭이 지나쳤던 나머지 다소 난잡한 영화가 되어버렸지만(샘 레이미의 원래 각본엔 베놈이 아예 등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는 히어로 영화 시리즈의  어떤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반면 후속주자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부작은 색다른 변주였다. 비록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샘 레이미의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으나 훨씬 덜 우중충했고 반짝거리는 청춘물의 분위기 역시 산뜻했다.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특히 좋았는데, 엠마 스톤이 연기한 그웬 스테이시는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의 한없이 수동적이던 메리 제인보다 여러모로 월등히 매력적이었다. 


그렇다면 <스파이더맨 : 홈커밍>은 어떨까? 새로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주춧돌이 되기에 충분할까? 물론 어차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이미 편입된 운명이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다음 편은 아이언맨 없이 스파이더맨 스탠드얼론으로 나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스파이더맨 : 홈커밍>, 사진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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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영화를 챙겨보시는 분

새로운 스파이더맨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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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스에 충실한 해석을 좋아하시는 분

산만함을 싫어하시는 분

마블 영화를 싫어하시는 분


덩케르크(2017)
2017. 7. 29. 00:27 - 북북서


<덩케르크(Dunkirk)>, 2017, 크리스토퍼 놀란

사진출처 다음영화


1940년 5월, 나치 독일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결성된 연합군은 덩케르크 해변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입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연합군의 본대가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죠. 뒤가 바다니 도망갈 곳은 없었고, 그렇다고 압도적인 기세의 독일군을 뚫어낸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후에 윈스턴 처칠이 이 상황을 가리켜 "영국군의 근간과 핵심과 수뇌(root, core, and brain)가 통째로 덩케르크에 발이 묶여 모조리 죽거나 포로가 될 것처럼 보였다" 며 "거대한 군사적 재앙(A colossal military disaster)"이라 평할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죠. 이대로 이 병력들을 잃는다면 독일을 제압하기는 커녕 당장 영국 본토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을 감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이나모 작전, 혹은 덩케르크 철수 작전입니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시작되면 이런 역사적 배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모든 설명을 시작과 동시에 나오는 단 몇 줄의 자막으로 퉁친 뒤 바로 전장을 비춥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총알은 날아오는데 적이 보이지 않아요. 화면은 지나치게 넓고 불안하게 황량하고, 대사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없습니다. 영화는 헐리웃 식 계속 흘러가고, 그제서야 관객들은 점차 깨닫게 됩니다. <덩케르크>는 분명 전쟁을 다룬 영화이지만 "전쟁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덩케르크>에서 기존 전쟁 영화의 화법을 전혀 따르지 않아요. 오히려 그간 전쟁 영화에서 차용되었던 요소를 모조리 생략하고 무시해버립니다.


전통적인 전쟁 영웅의 서사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당연히 격렬하고도 압도적인 전투가 있어야 하고, 그 전투를 아슬아슬하게 싸워 이겨낼 주인공 역시 요구됩니다. 이 주인공은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하고 응원할 만한 존재여야 하며 그런 주인공과 대적하는 적은 강하면 강할수록, 나쁘면 나쁠수록 좋습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 각각의 개인적인 드라마 역시 극의 기승전결에 극적인 모멘텀을 더해주지요. 이러한 모든 요소를 전장의 화법으로 완벽히 엮어낸 예로는 역시 그 유명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덩케르크>에는 전장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비춰냅니다. 우선 <덩케르크>에는 주인공이라 할 만한 캐릭터가 없습니다. 그나마 가장 얼굴을 자주 비추는 영국군 병사(포스터의 인물)는 영화 내내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습니다. 몇 살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캐릭터성이라 할 만한 요소가 그야말로 전무해요.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덩케르크>에는 가슴아픈 사연을 가진 군인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두고온 약혼녀도, 집에서 매일 아들의 생환을 기도하는 홀어머니도 없습니다. 감독은 이런 개개인의 드라마에 의미를 두는 대신. 대신 렌즈를 최대한 줌 아웃하여 각각의 병사가 아닌 덩케르크에서 살아 돌아가고자 하는 영국군 전체를 조망해요. 그리고 이는 영화가 진행되고 민간인 선주 도슨이 세 번째 중심인물로 편입되며 영국군을 넘어선 영국이라는 집단 전체로까지 확장됩니다. 즉, <덩케르크>는 하나의 성숙한 공동체가 위기를 이겨내는 방식을 묘사한 일종의 우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덩케르크>를 감상할 때는 사건과 인물들간의 관계를 어떤 함축적인 상징으로 읽어보려는 자세가 조금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영화의 역점은 개인의 드라마가 아닌 보다 보편적인 차원의 가치를 이야기하려 함에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덩케르크>에 혼자 멋지게 문제를 해결해내는 영웅은 없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모두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고 누군가를 도와 살아남습니다. 유독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더 큰 인물로 전투기 조종사 파리에가 있지만, 영화는 종반부에서 그보다 한 소년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의미심장한 부분이자 영화의 주제가 드러나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덩케르크(Dunkirk)>, 사진출처 imdb


이처럼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전통적인 전쟁 영화에서 많은 것을 덜어내고 재배치함으로서 <덩케르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분명 효과적인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영화의 난이도를 조금 올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해요. 앞서 말했듯 <덩케르크>에는 격렬한 전투의 원초적인 힘도, 살을 에는 듯한 긴장감이나 그것이 해소될 때의 카타르시스도 거의 없으니까요.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전쟁 영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런 영화를 기대한 사람은 드물 겁니다.  이는 전쟁 그 자체의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전쟁 영화로 변질되는 것을 우려한 듯, 놀란은 영화 내내 다수 대 다수의 전투를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전투기던 전함이던, 2대에서 3대를 넘기지 않습니다. 사상자가 심심치 않게 생김에도 피 역시 전혀 묘사하지 않습니다. 호불호의 영역이긴 하겠지만, 헐리웃 전쟁 영화의 탁월한 오락적 성격과 비교해 보면 <덩케르크>는 관객에 따라 조금은 지루할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위기에 맞서 서로를 의지하고 혹은 저버리는 관계를 그려내기 위해, <덩케르크>의 플롯은 기본적으로 위기와 위기의 해소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원형을 띄고 있습니다. 이는 주제의 전달이라는 관점에서는 분명 효과적이지만, 동시에 어떤 피로감을 유발하기도 해요. 영화의 배경이 러닝타임 내내 변화 없이 바다와 하늘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극적인 요소가 모두 단순화된 <덩케르크>의 특성상 이 피로감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놀란이 여러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동시에 다루는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해 세 가지 시간선을 한 데 엮어내는 묘기를 부리지만 그것 역시 이 피로감을 해소해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악화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덩케르크>가 굉장히 영국 예찬적인 영화라는 것입니다. 영국 국기가 나부끼는 장면도 매우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특히 후반부에 이르러서 처칠의 연설이 엘가의 <님로드>를 타고 흐를 때는 이건 거의 국뽕(...)이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 당시의 영국을 어떤 성숙한 공동체의 표상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작용인 것 같은데, 역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는 그 선택과 집중이 확실한 영화입니다. 여타 전쟁 영화와는 그 방향성이 완전히 다른 영화이며, 그 선택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목적 역시 멋지게 달성해냈죠. 그러나 훌륭한 주제의식에 비해 서사 자체의 오락성은 다소 경직되었으며 활기를 잃은 느낌도 어느정도 있습니다. 이 영화가 굉장히 재미있느냐 하면,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겠어요. 하지만 전쟁 영화의 역사가 있다면 한 페이지 정도 할애받을 만한 영화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이라는 소재가 기본으로 제공하는 모든 무기를 내려놓으며 보편적이면서도 숭고한 가치를 그려내다니, 이 얼마나 멋진 시도이자 성취인가요. 


<덩케르크(Dunkirk)>, 사진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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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전쟁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

주제의식이 좋은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

생각하게 되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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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한 기승전결을 좋아하시는 분

모든 종류의 국뽕을 혐오하시는 분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2017. 7. 27. 01:52 - 북북서




<수어사이드 스쿼드(Suicide Squad), 데이빗 에이어, 2016>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을까요? 대체 제작 단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정말로 멋진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던 재료가 이렇게 그 가능성을 펼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사그라질 때마다 저는 정말이지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그렇습니다. 조커가 나옵니다. 자레드 레토입니다. 할리퀸도 나옵니다. 마고 로비랍니다. 맙소사, 윌 스미스까지? 거기다가 연출은 잭 스나이더? 세상에, 정말 멋진 조합이에요. 세련되고 키치하고 발랄한 피카레스크가 나올 것 같군요! 



하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약속대로 조커가 나옵니다. 약속대로 자레드 레토입니다. 역시, 기대한대로 조커가 나오는 장면들은 꽤나 멋집니다. 이미 하나의 레퍼런스가 되어버린 히스 레저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에요. 조커의 사랑이라는 그림도 분명히 신선하고요. 근데 그게 다에요. 이 영화에서 조커의 역할? 없습니다. 이 영화의 메인 플롯은 조커와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극단적으로 조커와 조커의 시퀀스들을 모조리 빼버린다고 해도 영화는 아마 알아서 굴러갈 겁니다. 


할리퀸도 사정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마고 로비의 캐스팅도 찰떡같지만 영화를 캐리해내기엔 역부족이에요. 힘들겠죠.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캐릭터가 대차게 무너지기까지 합니다. 저는 사실 세상이 망할 위기에 대체 왜 할리퀸을 데려가는지 그것부터 잘 모르겠어요. 영화에 묘사된 부분만 보자면 얘는 그냥 아크로바틱한 여자애입니다. 무기는 평범한 야구방망이. 아니, 세상이 망할 위기라면서요. 빠따질을 할 거라면 차라리 이대호를 데려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조커와 할리퀸의 이야기 A, 그리고 빌런들을 모아 인챈트리스를 무찌르는 이야기 B. 앞서 말했듯 조커와 할리퀸의 이야기 A는 나름대로 강렬하지만 조각나있고 허술합니다. 메인 플롯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 B에 연결되는 방식도 느슨하고요(거의 두 시리즈를 억지로 꿰어다 붙인 크로스오버를 보는 것 같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아직 커버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점입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망가진 결정적인 이유는 이 메인 이야기 B가 굉장히 구리기 때문입니다. 


설정 자체만 놓고 보면 역시 좋아요. 고대의 악마에 빙의된 소녀, 그리고 그런 그녀를 사랑하게 된 감시자. 소시오패스 정치인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빌런들을 끌어모읍니다. 광고 카피는 <나쁜 놈들이 세상을 구한다!>. 뭐, 어떻게 세상을 구하긴 합니다. 근데 이 영화에 우리가 기대한 그런 이기적이고 유쾌하게 맛이 간 나쁜 놈은 없어요. 괜히 죄없는 공권력만 물어뜯다가 갑자기 가족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급기야는 서로 간의 전우애를 부르짖는 놈들이 대체 어떻게 나쁜 놈들인가요? "나는 이 옷이 싫어. 이 옷을 입으면 누군가 죽거든..." 같은 대사나 치는 자의식 덩어리를 대체 어떻게 진지한 배드애스로 받아들이라는 걸까요. 결말부에 이르러 할리퀸이 발음도 찰지게 "Friends!"를 뱉어 주실 때는 그냥 모든 걸 포기하게 되더군요. 어벤져스도 이렇게까지 사이가 좋진 않았는데요. 


게다가 쓸데없는 캐릭터가 너무 많습니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괜히 영화의 집중력만 분산시키는 놈들이 너무 많아요. 그 최고봉이라면 역시 마지막에 뜬금없이 등장한 그 일본 무사입니다. 그 일본 무사가 검을 쓰다듬으며 흐느끼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보다가 헛웃음이 터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 칼이 빨아들이는 건 영혼이 아니라 관객의 어처구니는 아니었을까요. 인챈트리스의 꿀렁꿀렁한 북북춤과 더불어 거의 지뢰와도 비슷한 무언가였습니다.


물론 나쁜 점만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킬링 타임으로도 못 볼 영화는 아니고, 헝클어진 플롯에서도 잭 스나이더는 잭 스나이더에요. 어둡고 세련된 색감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화면에 그나마 어떤 깊이감 비슷한 무언가를 줍니다. 특히 인챈트리스가 보내는 몬스터들의 질감이 특히 멋져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나쁜 놈이라 할 수 있는 아만다 월러의 캐릭터도 신선하고요. 평범한 몸매의 흑인 여성이 알고 보니 소시오패스 고위 공직자로 나오는 영화를 떠올려보려 했는데,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영화의 다른 장점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DC에게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을 영화입니다.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대참사 이후 DC는 상당히 위태로운 지점에 와 있었죠.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잘 나와 줬다면 어떤 국면의 전환을 이루어낼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요. 대체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그것도 마블이 <데드풀>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연이어 내놓으며 마냥 착하지 않은 캐릭터들로도 얼마든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다음에 말입니다. 어쩌면 마블의 첩자가 벌인 내부공작은 아니었을까요? 감독은 한번쯤 주변을 의심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할리퀸 스핀오프가 결정되었다는데, 그건 <수어사이드 스쿼드>보다는 나아야죠.


(이 영화의 난잡한 편집에 관해서는 워너 브라더스가 지나치게 간섭한 탓이라는 의견이 강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감독이 낸 확장판은 훨씬 낫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합니다. 하지만 극장판과 확장판의 차이는 아래 짤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추천

생각없이 볼 영화를 찾고 계신 분

감성팔이를 좋아하시는 분

마고 로비의 할리퀸을 보고 싶으신 분

산만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비추천

개연성있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나쁜 놈들을 보고 싶으신 분

감성팔이를 싫어하시는 분

어이없는 걸 싫어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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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커버넌트, 2017, 리들리 스콧)



전작 <프로메테우스>는 다소 모호한 영화였다. 하나의 독자적인 SF영화로 보기엔 <에일리언>이라는 거대한 시리즈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고, 그렇다고 <에일리언>의 정식 프리퀄로 보기엔 그 연결고리가 희미했다. <프로메테우스>는 프리퀄로써 설명을 제시하는 대신 오히려 더 많은 의문점을 남긴다. 그래서 스페이스 자키는 왜 거기 있었는가? 엔지니어는 왜 검은 액체를 지구로 운반하려 했는가? 물론 치명적인 허점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적 허용이라고 넘기기엔 좀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에일리언 커버넌트>는 나쁘지 않은 뒷수습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안한 포지셔닝을 좀 더 견고히 하고 새로운 <에일리언> 이야기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첫째로, 결국 이 프리퀄 시리즈는 기존의 <에일리언> 우주와 연결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당장은 영화상의 시간 순서가 삐걱거리고 맥거핀들이 춤을 추는 등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에일리언 커버넌트>는 두 시리즈 간의 통일성 비슷한 무언가를 제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새로운 시리즈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심지어는 에일리언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데이빗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에일리언> 프리퀄 시리즈의 주제는 다름아닌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립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제시되었고,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꽃을 피웠다. <에일리언 커버넌트> 시점에서 창조의 연쇄는 다음과 같다.


엔지니어 -> 인간 -> 데이빗 -> 제노모프


인간은 엔지니어의 피조물이며 데이빗의 창조주이다. 데이빗은 인간의 피조물이며 제노모프의 창조주다(사실 엄밀히 말해 <에일리언 커버넌트>에 나오는 에일리언은 프로토모프와 네오모프이지만 편의상 제노모프로 통일하기로 한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데이빗은 만들어진 직후 자신의 창조주인 웨이랜드와 대면하고, 그의 오만함과 나약함에 강한 거부감을 품는다. 이 거부감은 <프로메테우스>에서 묘사된 일련의 사건을 거쳐 인류 전체에 대한 실망과 혐오로 귀결된다. 결국 데이빗이 제노모프를 창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보다 열등한 창조주를, 그리고 자신이 그처럼 열등한 종족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결말, "완벽한 생명체"를 탄생시키고 다니엘스를 제압함으로써 인간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순간, 데이빗은 피조물에서 창조주로의 완전한 입지 전환을 이루어낸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국의 졸이 되길 거부하고 지옥의 왕좌에 앉는 순간이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프로이트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프로이트는 유명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예로 들며 아들에게 아버지란 질투의 대상이며 자신을 억압하는 구속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적의를 품을 수 밖에 없으며, 이는 극단적인 경우 존속살해로 나타난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아들은 언젠가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새로운 아들에게 질투의 대상이자 그를 억압하는 구속자이다. 그토록 증오했던 존재를 닮아가는, 순환하는 비극이다. 


암시와 복선은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영화의 처음, 웨이랜드는 데이빗에게 바그너의 교향곡을 연주하라고 지시한다. 선곡은 <신들의 발할라 입성(Einzug der Götter in Walhall)>. 자신이 창조주이며 신이 되었다는 웨이랜드의 오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곡은 영화의 결말부에 다시 한 번 울려퍼진다. 바로 데이빗이 인간을 제압하고 제노모프의 창조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다. 심지어 이번엔 피아노 연주도 아닌, 오케스트라가 함께 한 버전이다. 웨이랜드가 데이빗의 연주를 듣고 오케스트라가 없어 삭막하다고 트집을 잡았던 것을 기억하자. 데이빗은 웨이랜드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 부르며 경멸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를 닮아간다.



또한, 웨이랜드가 데이빗의 이름을 물었을 때 웨이랜드의 방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놓여 있다. 다비드 상은 가장 완벽한 인간의 육체로 일컬어지는 조각이다. 데이빗의 이름의 유래는 바로 이 다비드 상이며, 데이빗은 인간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완벽히 인간과 같다. 웨이랜드가 안드로이드에게 "완벽한 인간"의 이름을 주었다는 사실은 "완벽한 생물"을 창조하겠다는 데이빗의 욕망과 정확하게 대응한다. 


자신이 창조해낸 피조물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데이빗은 웨이랜드를 열등하다 여기며 나아가 인류를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종족으로 규정한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시점에서 데이빗에게 인간이란 그저 그의 창조를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데이빗의 피조물인 제노모프는? 처음에는 데이빗의 행동을 따라하는 등 교감의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다니엘스와 제노모프의 전투 시퀀스 도중, 화면 너머 데이빗의 얼굴을 발견한 제노모프는 돌연 강렬한 공격성을 보이며 모니터를 물어뜯는다. 데이빗 본인이 그랬듯, 피조물은 거역한다.


이렇듯 데이빗과 웨이랜드로 대표되는 인류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유사 부자관계를 형성한다. 새로운 <에일리언> 프리퀄 시리즈는 창조주로 올라서고자 하는 피조물의 이야기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은 자신의 창조주를 닮아가는 아이러니의 플롯이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시퀄은 2018년에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에일리언 커버넌트>를 토대로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우선 데이빗은 자신의 오만에 매몰되어 몰락할 운명임이 어느정도 분명해 보인다. 데이빗이 계속해서 인용하는 <오지만디아스>를 떠올려보자. 분명 데이빗은 자신의 창조주와 그 창조주의 창조주까지 학살해내는, 피조물로서는 대단한 위업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오지만디아스>의 저자는 바이런이 아닌 퍼시 셸리이며, 그 메세지는 절대자의 권능이 아닌 그 소멸의 덧없음이다. 그리고 그 소멸을 주도할 존재는 물론 그의 피조물 에일리언이다. 



사실 <프로메테우스>와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에일리언들은 데이빗의 피조물이자 극의 서스펜스를 이끄는 보조적인 역할에 가까웠다. 두 영화는 어디까지나 데이빗이 인간을 넘어서는 과정이었으며, 에일리언은 조금 과장하면 스토리적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영화에서 그들은 데이빗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창조주를 살해할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리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또다시 순환하고, 에일리언들은 이전 <에일리언> 시리즈의 그것과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네오모프와 프로토모프는 사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제노모프와는 큰 차이가 있다. 훨씬 약하며, 훨씬 우둔하고 원시적이다).


이 예상이 맞을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어쩌면 정 반대로 데이빗은 프로이트적 동어반복을 탈피하고 정말로 초월자의 위치에까지 도달할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매혹적인 이야기이며 보고 싶은 그림이다. 데이빗이 어떻게 몰락할 것인지, 몰락하긴 할 것인지, 그리고 에일리언들은 어떻게 자신의 창조주를 살해하고 주체성을 집어삼킬 것인지 알고 싶다. 빨리 다음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덧. 멋진 이야기와 서스펜스에 충실한 호러, 여전히 멋진 컨셉 디자인에 비해 개연성의 미비점은 많이 아쉽다. 수천 명의 이주민을 보호해야 하는 전문가들이 별다른 보호 장비도 없이 외계 행성을 마구 돌아다닌다거나, 정체불명의 괴물이 습격해 동료가 마구 죽어나감에도 당당히 혼자 씻으러 간다거나 하는 상황이 자주 눈에 밟힌다. 후반부 다니엘스가 갑자기 강인한 여전사로 돌변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보이듯 전체적으로 개연성보다는 플롯의 진행을 위한 기능성을 우선한 인상이 강한데, 굉장히 좋은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후반부의 반전 역시 조금 더 치밀하고 극적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덧. 이미지는 모두 에일리언 위키 Xenopedia에일리언 커버넌트 imdb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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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2017)
2017. 3. 26. 17:45 - 북북서

<로건>, 제임스 맨골드, 2017



엑스맨 시리즈의 속편이 곧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게 <울버린> 영화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 기대치는 거의 바닥을 기었다. 이번 영화는 꽤 괜찮대, 라는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더 울버린>과 <엑스맨 아포칼립스>를 차례로 겪으며 난 확신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 엑스맨은 망했구나. <레지던트 이블>과 <트랜스포머>가 기다리는 망한 시리즈의 심연으로 떨어졌구나. 어쩌다 심야의 강남 CGV에 앉았을 때까지도 내게 <로건>은 차라리 불안감이었다. 제발 평타만 쳐 줬으면 했다. 어떻게 다음 영화가 나올 정도로만 해 줬으면! 그래도 챙겨봤던 시리즈가 <존 카터> 꼴이 나는 건 정말 마음아픈 일이니까. 


하지만 <로건>은 달랐다. 화면의 질감부터 아득히 다른 영화다. 다음 시리즈의 포석을 놓지도,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편입하려 같잖은 윙크를 찡긋거리지도 않는다. 커녕 나는 <로건>이 '엑스맨 시리즈'이긴 한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영화의 첫 시퀀스가 끝나고 프로페서 X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로건>에 엑스맨 시리즈의, 그리고 '슈퍼 히어로 영화'의 보편적인 구조는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이 영화의 제목은 <울버린>이 아닌 <로건>이며, 감독은 우리가 그간 엑스맨 영화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협의한 암묵의 룰, '당연히 그렇게 되진 않겠지만'의 안전구역을 가차없이 후벼팔 작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번쩍이는 그래픽, 조금은 유치한 스판덱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뮤턴트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모두 덜어낸 <로건>의 이야기는 한없이 작다. 작고, 거칠고, 너무나 애처롭다. 리무진에서 트럭으로, 트럭에서 승합차로 모든 것이 그저 망가져만 가는 울버린의 여정은 그 자체로 애처로운 로드무비다. 너덜너덜한 몸 하나를 방패로 존재조차 불확실한 어떤 빛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모습에 이입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며, 그 몰입감의 결에 있어 <로건>은 그동안의 모든 히어로 영화들, 심지어 <다크 나이트>의 그것보다도 예리하다. 그 길에서 벌어지는 액션 또한 이제껏 터질듯한 근육과 호쾌한 야성으로 기억되온 울버린의 그것이 아니다. 처절하고, 애틋하다. 주인공의 상처 하나 하나가 이토록 저릿한 경험은 흔치 않다.


물론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메인이라고 할 만한 빌런 두 명은 각자 개성은 확실하나 영화 전체의 참신함을 받쳐내기엔 조금 얕다. 그들의 음모나 설명 또한 서사에서 상당한 역할을 지녔으면서도 그 연결고리가 작고 헐겁다. 때문에 갈등이 고조되는 후반부의 폭발력이 조금은 떨어지는 구석도 있다.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었던 부분으로도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 울버린을 가장 잔혹하게 괴롭히는 것은 어떤 캐릭터나 그들의 행동이 아닌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에너지의 폭발로 극복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섬세하게 접합될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남는다.


많은 것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영화다. <본 아이덴티티>, 혹은 <다크 나이트>가 그랬듯 장르 안에서 하나의 빛나는 레퍼런스가 될 수도 있겠다고 믿는다. 시리즈 안으로 관점을 좁히자면, 새로운 히어로의 프리퀄로서도 훌륭하다. 하지만 그런 내일의 이야기를 바라보기에 앞서 <로건>의 무게는 역시 끝에 놓여 있다. 17년 동안 사랑받았던 캐릭터가, 시리즈가, 그리고 그들로 대표되는 하나의 이야기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방식으로 <로건>은 완벽하다. 더는 총성이 울리지 않는 계곡, 조금 기울어진 십자가 밑이 부디 편안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