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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커버넌트, 2017, 리들리 스콧)



전작 <프로메테우스>는 다소 모호한 영화였다. 하나의 독자적인 SF영화로 보기엔 <에일리언>이라는 거대한 시리즈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고, 그렇다고 <에일리언>의 정식 프리퀄로 보기엔 그 연결고리가 희미했다. <프로메테우스>는 프리퀄로써 설명을 제시하는 대신 오히려 더 많은 의문점을 남긴다. 그래서 스페이스 자키는 왜 거기 있었는가? 엔지니어는 왜 검은 액체를 지구로 운반하려 했는가? 물론 치명적인 허점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적 허용이라고 넘기기엔 좀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에일리언 커버넌트>는 나쁘지 않은 뒷수습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안한 포지셔닝을 좀 더 견고히 하고 새로운 <에일리언> 이야기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첫째로, 결국 이 프리퀄 시리즈는 기존의 <에일리언> 우주와 연결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당장은 영화상의 시간 순서가 삐걱거리고 맥거핀들이 춤을 추는 등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에일리언 커버넌트>는 두 시리즈 간의 통일성 비슷한 무언가를 제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새로운 시리즈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심지어는 에일리언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데이빗의 이야기이다.




새로운 <에일리언> 프리퀄 시리즈의 주제는 다름아닌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립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제시되었고,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꽃을 피웠다. <에일리언 커버넌트> 시점에서 창조의 연쇄는 다음과 같다.


엔지니어 -> 인간 -> 데이빗 -> 제노모프


인간은 엔지니어의 피조물이며 데이빗의 창조주이다. 데이빗은 인간의 피조물이며 제노모프의 창조주다(사실 엄밀히 말해 <에일리언 커버넌트>에 나오는 에일리언은 프로토모프와 네오모프이지만 편의상 제노모프로 통일하기로 한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데이빗은 만들어진 직후 자신의 창조주인 웨이랜드와 대면하고, 그의 오만함과 나약함에 강한 거부감을 품는다. 이 거부감은 <프로메테우스>에서 묘사된 일련의 사건을 거쳐 인류 전체에 대한 실망과 혐오로 귀결된다. 결국 데이빗이 제노모프를 창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보다 열등한 창조주를, 그리고 자신이 그처럼 열등한 종족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결말, "완벽한 생명체"를 탄생시키고 다니엘스를 제압함으로써 인간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순간, 데이빗은 피조물에서 창조주로의 완전한 입지 전환을 이루어낸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국의 졸이 되길 거부하고 지옥의 왕좌에 앉는 순간이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프로이트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프로이트는 유명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예로 들며 아들에게 아버지란 질투의 대상이며 자신을 억압하는 구속자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적의를 품을 수 밖에 없으며, 이는 극단적인 경우 존속살해로 나타난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아들은 언젠가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새로운 아들에게 질투의 대상이자 그를 억압하는 구속자이다. 그토록 증오했던 존재를 닮아가는, 순환하는 비극이다. 


암시와 복선은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영화의 처음, 웨이랜드는 데이빗에게 바그너의 교향곡을 연주하라고 지시한다. 선곡은 <신들의 발할라 입성(Einzug der Götter in Walhall)>. 자신이 창조주이며 신이 되었다는 웨이랜드의 오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곡은 영화의 결말부에 다시 한 번 울려퍼진다. 바로 데이빗이 인간을 제압하고 제노모프의 창조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다. 심지어 이번엔 피아노 연주도 아닌, 오케스트라가 함께 한 버전이다. 웨이랜드가 데이빗의 연주를 듣고 오케스트라가 없어 삭막하다고 트집을 잡았던 것을 기억하자. 데이빗은 웨이랜드를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 부르며 경멸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를 닮아간다.



또한, 웨이랜드가 데이빗의 이름을 물었을 때 웨이랜드의 방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놓여 있다. 다비드 상은 가장 완벽한 인간의 육체로 일컬어지는 조각이다. 데이빗의 이름의 유래는 바로 이 다비드 상이며, 데이빗은 인간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완벽히 인간과 같다. 웨이랜드가 안드로이드에게 "완벽한 인간"의 이름을 주었다는 사실은 "완벽한 생물"을 창조하겠다는 데이빗의 욕망과 정확하게 대응한다. 


자신이 창조해낸 피조물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데이빗은 웨이랜드를 열등하다 여기며 나아가 인류를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종족으로 규정한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시점에서 데이빗에게 인간이란 그저 그의 창조를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데이빗의 피조물인 제노모프는? 처음에는 데이빗의 행동을 따라하는 등 교감의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다니엘스와 제노모프의 전투 시퀀스 도중, 화면 너머 데이빗의 얼굴을 발견한 제노모프는 돌연 강렬한 공격성을 보이며 모니터를 물어뜯는다. 데이빗 본인이 그랬듯, 피조물은 거역한다.


이렇듯 데이빗과 웨이랜드로 대표되는 인류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유사 부자관계를 형성한다. 새로운 <에일리언> 프리퀄 시리즈는 창조주로 올라서고자 하는 피조물의 이야기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은 자신의 창조주를 닮아가는 아이러니의 플롯이다.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시퀄은 2018년에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에일리언 커버넌트>를 토대로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우선 데이빗은 자신의 오만에 매몰되어 몰락할 운명임이 어느정도 분명해 보인다. 데이빗이 계속해서 인용하는 <오지만디아스>를 떠올려보자. 분명 데이빗은 자신의 창조주와 그 창조주의 창조주까지 학살해내는, 피조물로서는 대단한 위업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오지만디아스>의 저자는 바이런이 아닌 퍼시 셸리이며, 그 메세지는 절대자의 권능이 아닌 그 소멸의 덧없음이다. 그리고 그 소멸을 주도할 존재는 물론 그의 피조물 에일리언이다. 



사실 <프로메테우스>와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에일리언들은 데이빗의 피조물이자 극의 서스펜스를 이끄는 보조적인 역할에 가까웠다. 두 영화는 어디까지나 데이빗이 인간을 넘어서는 과정이었으며, 에일리언은 조금 과장하면 스토리적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영화에서 그들은 데이빗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창조주를 살해할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리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또다시 순환하고, 에일리언들은 이전 <에일리언> 시리즈의 그것과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네오모프와 프로토모프는 사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제노모프와는 큰 차이가 있다. 훨씬 약하며, 훨씬 우둔하고 원시적이다).


이 예상이 맞을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어쩌면 정 반대로 데이빗은 프로이트적 동어반복을 탈피하고 정말로 초월자의 위치에까지 도달할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매혹적인 이야기이며 보고 싶은 그림이다. 데이빗이 어떻게 몰락할 것인지, 몰락하긴 할 것인지, 그리고 에일리언들은 어떻게 자신의 창조주를 살해하고 주체성을 집어삼킬 것인지 알고 싶다. 빨리 다음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덧. 멋진 이야기와 서스펜스에 충실한 호러, 여전히 멋진 컨셉 디자인에 비해 개연성의 미비점은 많이 아쉽다. 수천 명의 이주민을 보호해야 하는 전문가들이 별다른 보호 장비도 없이 외계 행성을 마구 돌아다닌다거나, 정체불명의 괴물이 습격해 동료가 마구 죽어나감에도 당당히 혼자 씻으러 간다거나 하는 상황이 자주 눈에 밟힌다. 후반부 다니엘스가 갑자기 강인한 여전사로 돌변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보이듯 전체적으로 개연성보다는 플롯의 진행을 위한 기능성을 우선한 인상이 강한데, 굉장히 좋은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후반부의 반전 역시 조금 더 치밀하고 극적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덧. 이미지는 모두 에일리언 위키 Xenopedia에일리언 커버넌트 imdb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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