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건>, 제임스 맨골드, 2017
엑스맨 시리즈의 속편이 곧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게 <울버린> 영화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 기대치는 거의 바닥을 기었다. 이번 영화는 꽤 괜찮대, 라는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더 울버린>과 <엑스맨 아포칼립스>를 차례로 겪으며 난 확신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 엑스맨은 망했구나. <레지던트 이블>과 <트랜스포머>가 기다리는 망한 시리즈의 심연으로 떨어졌구나. 어쩌다 심야의 강남 CGV에 앉았을 때까지도 내게 <로건>은 차라리 불안감이었다. 제발 평타만 쳐 줬으면 했다. 어떻게 다음 영화가 나올 정도로만 해 줬으면! 그래도 챙겨봤던 시리즈가 <존 카터> 꼴이 나는 건 정말 마음아픈 일이니까.
하지만 <로건>은 달랐다. 화면의 질감부터 아득히 다른 영화다. 다음 시리즈의 포석을 놓지도,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편입하려 같잖은 윙크를 찡긋거리지도 않는다. 커녕 나는 <로건>이 '엑스맨 시리즈'이긴 한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영화의 첫 시퀀스가 끝나고 프로페서 X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로건>에 엑스맨 시리즈의, 그리고 '슈퍼 히어로 영화'의 보편적인 구조는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이 영화의 제목은 <울버린>이 아닌 <로건>이며, 감독은 우리가 그간 엑스맨 영화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협의한 암묵의 룰, '당연히 그렇게 되진 않겠지만'의 안전구역을 가차없이 후벼팔 작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번쩍이는 그래픽, 조금은 유치한 스판덱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뮤턴트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모두 덜어낸 <로건>의 이야기는 한없이 작다. 작고, 거칠고, 너무나 애처롭다. 리무진에서 트럭으로, 트럭에서 승합차로 모든 것이 그저 망가져만 가는 울버린의 여정은 그 자체로 애처로운 로드무비다. 너덜너덜한 몸 하나를 방패로 존재조차 불확실한 어떤 빛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모습에 이입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며, 그 몰입감의 결에 있어 <로건>은 그동안의 모든 히어로 영화들, 심지어 <다크 나이트>의 그것보다도 예리하다. 그 길에서 벌어지는 액션 또한 이제껏 터질듯한 근육과 호쾌한 야성으로 기억되온 울버린의 그것이 아니다. 처절하고, 애틋하다. 주인공의 상처 하나 하나가 이토록 저릿한 경험은 흔치 않다.
물론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메인이라고 할 만한 빌런 두 명은 각자 개성은 확실하나 영화 전체의 참신함을 받쳐내기엔 조금 얕다. 그들의 음모나 설명 또한 서사에서 상당한 역할을 지녔으면서도 그 연결고리가 작고 헐겁다. 때문에 갈등이 고조되는 후반부의 폭발력이 조금은 떨어지는 구석도 있다.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었던 부분으로도 보이는데, 이 영화에서 울버린을 가장 잔혹하게 괴롭히는 것은 어떤 캐릭터나 그들의 행동이 아닌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에너지의 폭발로 극복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섬세하게 접합될 수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남는다.
많은 것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영화다. <본 아이덴티티>, 혹은 <다크 나이트>가 그랬듯 장르 안에서 하나의 빛나는 레퍼런스가 될 수도 있겠다고 믿는다. 시리즈 안으로 관점을 좁히자면, 새로운 히어로의 프리퀄로서도 훌륭하다. 하지만 그런 내일의 이야기를 바라보기에 앞서 <로건>의 무게는 역시 끝에 놓여 있다. 17년 동안 사랑받았던 캐릭터가, 시리즈가, 그리고 그들로 대표되는 하나의 이야기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방식으로 <로건>은 완벽하다. 더는 총성이 울리지 않는 계곡, 조금 기울어진 십자가 밑이 부디 편안하기를 빈다.
'리뷰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파이더맨 : 홈커밍(2017) (0) | 2017.08.04 |
---|---|
덩케르크(2017) (0) | 2017.07.29 |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0) | 2017.07.27 |
에일리언 커버넌트 리뷰 : 프로이트적 동어반복의 비극(스포일러) (0) | 2017.05.15 |
컨택트(Arrival) (0) | 2017.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