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 골든 서클>, 2017, 매튜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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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어느 정도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킹스맨>은 본질적으로 정치인들의 머리가 엘가의 음악에 맞춰 터져나가고 양 다리에 칼 의족을 단 여자가 비밀요원들을 두동강내는 영화였다. 이런 난폭한 영화가 그토록 대중적으로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강한 B급 테이스트를 완충해 줄 "매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폭주하는 똘끼와 키치함에 수트를 입히고 구두를 신겨 까리하게 꾸민 그 특유의 스타일리시함이야말로 <킹스맨>의 정체성이자 매력이었으며, 동시에 이 영화가 신선한 수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킹스맨 : 골든 서클>역시 처음엔 <킹스맨>이 개척해놓은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하면 영국 전역의 킹스맨 본부가 미사일을 맞아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전 세계의 마약시장을 배후에서 장악한 싸이코패스 마약왕 미스 포피다. 그녀는 자신의 마약을 이용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 전편 마지막에서 구출해낸 스웨덴 공주 틸드와 행복한 동거 중이던 에그시는 살아남은 킹스맨 요원들을 규합하고 미국의 비밀 요원 스테이츠맨들과 함께 미스 포피의 계획을 저지해야 한다.
<킹스맨 : 골든 서클>, 사진출처 IMDB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처음에는 희미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위화감이 커진다. 그러다 미국의 비밀조직인 스테이츠맨이 등장하는 순간 폭발한다. 이것은 병맛이다. <킹스맨 : 골든 서클>은 거의 병맛 코미디 영화다. <골든 서클>의 B급 병맛 감성은 <킹스맨>의 그것에 비해 훨씬 말초적이고 저속하다. 전체적으로 많이 미국스러우며 개그의 색감도 한층 다채로워졌다. 센스 자체도 나쁘지 않아 정신이 아득해지는 미국식 개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많이 웃을 수 있겠다고도 생각한다. 그 화룡정점은 역시 엘튼 존이다. 카메오라더니 분량이나 역할은 웬만한 조연보다 많다. 조금 안 보인다 싶으면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며 등장해 관객의 정신을 아득하게 한다. 조심스럽게 예측해보자면 매튜 본은 이번에 거의 진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킹스맨>도 전혀 진지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지한 척을 할 수는 있는 영화였다. <골든 서클>은 아니다.
요는 균형감각의 부재이다. <킹스맨>이 A급의 외형과 B급의 본질 간의 교묘한 결합이었다는 이야기는 처음에 했다. <골든 서클>이 전작의 성공을 이어가려면 한층 진해진 병맛 B급 테이스트를 다른 영화적 요소가 완충해줘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액션은 좋다. 하지만 전편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나 롱테이크 교회 시퀀스같이 방점을 찍어 줄 만한 장면이 없다. 악역은? 역시 발렌타인과 가젤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하다. 싸이코패스 마약왕 미스 포피는 그 설정이나 역할만 보면 정말 좋은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화면을 할애받지 못한다. 엘튼 존의 의아하리만치 많은 분량을 떠올려보면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다. 줄리안 무어는 그 적은 분량에서도 최선의 연기를 해 주지만 안타깝게도 초반부가 지나가면 어떤 임팩트를 남기지는 못하며, 캐릭터성이나 존재감이 이상하게 희미한 찰리 역시 제대로 된 악역 구실을 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골든 서클> 마케팅의 한 축인 스테이츠맨은 어떤가 하면, 스테이츠맨은 더 나쁘다.
<킹스맨 : 골든 서클>, 사진출처 IMDB
스테이츠맨은 이야기상 어떤 역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부터 설정까지, 그들은 철저히 개그를 위해 만들어진 움직이는 스테레오타입이며 분량 자체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영화가 내뿜는 미국식 B급 코미디의 바이브는 80% 스테이츠맨에서 나온다. 물론 패러디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캐릭터 자체가 패러디를 위한 소모품이라면 그것은 약점이 된다. 플롯을 이끌 인물이 없으니 이야기 자체가 얄팍해진다는 것이다. 고작 이런 캐릭터들을 위해 아카데미 수상자인 할리 베리와 제프 브리지스, <폭스 캐처>와 <헤이트풀8>으로 입지를 다진 채닝 테이텀을 캐스팅했다는 게 의아할 정도다. 페드로 파스칼의 캐릭터는 그나마 상황이 낫지만 역시 뻔한 기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후반부 밝혀지는 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코미디였다.
<골든 서클>은 안타깝게도 <킹스맨>의 성공을 가능케 했던 놀라운 내적 균형이 무너진 영화다. A급의 만듦새는 약해졌고 B급의 본질은 더 진해졌다. 영화가 B급 테이스트에 매몰되었다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분명 <킹스맨>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매너"는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재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쉴새없이 파고드는 B급 취향의 개그는 유쾌하고 다채로운 대중 문화의 인용은 군데군데 교묘하며 직관적이면서도 화려한 액션은 여전히 좋다. 전편에 비하면 조금 모양이 빠지게 나오지만 콜린 퍼스 역시 여전히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썩 재밌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킹스맨>이 아닐 뿐이다.
<킹스맨 : 골든 서클>, 사진출처 IMDB
덧. 전작 <킹스맨>에서 마지막 힐드 공주의 애널 섹스 대사와 관련해 논란이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골든 서클>은 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조금 편집될 것 같기는 하지만(미국판 기준으로 쓴다) 상당히 의문스러운 설정과 그에 따른 노골적인 장면이 있으며 그 행위의 대상이 되는 여자 캐릭터 역시 어떤 도구로 소모될 뿐 어떤 캐릭터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전편에서 다름 에그시의 라이벌이었던 록시의 대우 역시 상당히 미묘하다. 자신이 문화예술에서 성차별과 관련한 문제에 예민하다면 주의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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