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
사진출처 다음영화, imdb
디즈니의 <주먹왕 랄프>(2012)는 미생물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픽사식 애니메이션의 오락실 버전이다. 8비트 버전 <토이 스토리>라고 해도 좋겠다. 레트로 아케이드 게이밍의 캐릭터들이 사실은 살아있다면? 오락실 불이 꺼지면 인간들 몰래 모여 술도 마시고 서로의 게임에 놀러간다면?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꽤나 괜찮은 소재다. 그리고 결과물인 영화 역시 꽤나 괜찮았다. 이야기도, 캐릭터도, 코미디도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수작이었다. 혹시 디즈니나 픽사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데 <주먹왕 랄프>를 아직 안 봤다면 꼭 보시라. 넷플릭스에도 있다.
다만 <주먹왕 랄프>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오락실, 즉 아케이드 자체가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인터넷과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밀레니얼들은 아케이드 게이밍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주먹왕 랄프>에 나오는 소닉이 낯설며 장기에프나 큐버트를 더더욱 모른다. 따라서, 그들의 등장에서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 시점에서 <주먹왕 랄프>는 아이들용 애니메이션이 아니게 되었다. 작품성과 관련이 있는 요소는 아니지만, 제작사로서는 흥행과 연결되는 부분인 만큼 여러모로 아쉬웠을 테다. 그래서일까,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는 그 배경을 인터넷으로 옮겼다. 1편 개봉 당시 속편은 콘솔 게이밍을 소재로 하겠다던 감독의 포부와는 많이 다른 결과다. 저연령층을 포함해 더 넓은 관객층을 타겟으로 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그래서 그 시도는 성공했는가?
다행히 실패하지는 않았다. <주먹왕 랄프 2>는 재기발랄한 영화다. 이베이와 유투브, 버즈피드를 비롯한 영미권 인터넷 문화를 스크린으로 잘 녹여 냈고, <스타워즈>부터 <곰돌이 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그리고 예고편에 나온 디즈니 공주들까지 미디어 공룡 디즈니의 초호화 저작권 자랑도 진귀한 볼거리다. <주먹왕 랄프 2>는 이렇듯 화려한 물량의 폭격을 통해 '다음엔 또 뭐가 나올까'하는 기대감을 영화 내내 끌고 가는 데에 성공한다. 가볍고 즐겁게, 내내 감탄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라는 뜻이다 (그리고 카 체이스 씬의 퀄리티가 생각보다 엄청나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이야기의 예술이지 천하제일 레퍼런스 대회가 아닐 것이다. 재치있고 다양한 대중 문화의 인용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소이다. 아무리 가니쉬가 다채롭고 맛있어도 스테이크의 퀄리티가 좋지 못해서야 제대로 된 파인 다이닝이라 칭하기 어렵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모든 가니쉬를 걷어낸 <주먹왕 랄프2>의 스테이크는, 조금 얄팍하고 설익었다.
<주먹왕 랄프>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토이 스토리>를 위시한 픽사식 애니메이션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다. 하지만 <토이 스토리>와 <니모를 찾아서>, 그리고 <주먹왕 랄프> 1편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단순히 그 소재가 독특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주제와 이야기가 단단하게 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주먹왕 랄프 2>는 반짝거리는 소도구와 화려한 아이캐치를 잔뜩 사용해 관객들의 주의를 내내 화면에 붙잡아 두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게 전부다. 시선은 끌지만 막상 보여주는 이야기가 별다른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헐겁고, 종종 부자연스럽다.
가장 큰 피해자는 단연 주인공인 랄프와 바넬로피의 캐릭터다. 1편에서는 두 명 모두 명확하고 공감이 가는 동기와 감정선을 가지고 있었다. 2편에서는 아니다. 거의 역대급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바넬로피는 답답해졌고, 랄프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의처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극에 갈등을 부여하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도가 지나쳤다. 캐릭터들이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는 합당한 이유가 아니다.
요약하자면,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는 조금 아쉬운 후속작이다. 여러가지 볼거리는 풍성하나 탄탄한 서사에서 오는 만족감은 부재한다. 저연령층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볼거리를 넣으려다 균형이 무너져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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