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얀 체르니슬라브, 2017
지하도시가 있다. 한 선지자가 모든 것들 예견하고 지어놓은 곳이다. 바깥 세상에 무슨 일이 닥쳤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선지자는 옳았고, 사람들은 지하도시로 몰려든다.
지하도시는 크고, 넓다. 200명분의 물, 공기, 식량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즉, 이 지하도시의 인구 한계는 200명이다.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구가 늘어난다. 200명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가 201명 째의 아이를 임신한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결론이 내려진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난다. 200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목을 매단다. 그의 이름은 톰이다. 인구수는 다시 200이 된다. 사람들은 톰을 기억한다. 아이는 자신을 위해 죽은 이의 이름을 이어받아 톰이 된다. 톰은 지하도시에서 살아간다. 다음 톰을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할 그 때까지.
시간이 흐른다. 규칙은 견고해진다. 많은 아이가 태어나고 많은 어른이 자리를 내준다. 모두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다. 숭고한 의무로 여긴다. 지하도시는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하도시의 문을 두드린다.
묘한 영화다. 우선 편집이 그렇다. 중반부까지 영화의 반복되는 모티브는 "순환"이다. 순환을 테마로 한 시퀀스가 계속해서 변주되지만 항상 어딘가 맞지 않는 컷들이 섞여있다. 의도적으로 배치된 이 교묘한 불균형은 마치 거슬리는 불협화음처럼 점점 커지며 영화 내내 이 순환의 영원성이 실은 굉장히 불안정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자극한다. 그리고 내재된 시스템의 결함이 외부인의 등장으로 기폭하는 순간, 불안감은 현실이 된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201명째의 순환이 끊어지고 영화가 내면의 지옥도를 비추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댐에서 터져나온 물살처럼 질주한다.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던 체코 영화 특유의 유머도 사라진다. 인물들은 더이상 이성과 가치를 내세우지 않는다. '우리'와 '저들'이 나뉘고 이성과 가치로 애써 달래졌던 날 것의 감정은 광기의 얼굴을 드러낸다.
얀 체르니슬라브는 아직 신인의 축에 드는 감독이다. <201>은 그의 세 번째 장편 영화다. 첫 작품이었던 <강의 밑바닥>은 다소 현학적이었고 두 번째 <그림자>는 반대로 기시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 두 영화 모두 화면 밑에 기묘한 질감의 에너지가 흘렀다. 그리고 <201>에서 얀 체르니슬라브는 드디어 그 에너지와 서사가 효과적으로 배합되는 지점을 찾은 듯 하다. 불온하고, 거칠고, 본능적이나 동시에 무감정할 정도로 건조하다. 저예산임을 감안하지 않아도 그렇다. 서사와 그 서술이 분리되는 낙차가 이질적이며 또한 참을 수 없이 멋지다.
<201>은 시스템과, 규칙과, 그것을 따르는 인간에 대한 의문이다. 마지막 장면은 상징적이다. 녹슨 칼은 왜 그곳에 있었을까. 누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죽였던 것일까.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때로는 대답하지 않음으로서 대답해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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