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키보드를 (드디어) 샀다. 용산 선인상가에서 한참을 두드려 본 후 한성의 CHL8 Happytypist로 결정했다. 텐키리스에 무접점이다. 글로만 줄창 들었던 포각포각이 뭔지, 왜들 그렇게 좋다고들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다. 포각포각, 포각포각.
2. 레딧에서 주운 사진 하나.
(원 유투브 동영상은 https://www.youtube.com/watch?v=QdBEcjRKLXc)
제목부터 강렬하다. "플라스틱 의자 매니아들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지고 싶어하는 의자 5가지" 라니. 나는 여태까지 플라스틱 의자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 플라스틱 의자는 거기서 거기니까. 저 유투브 캡처만 봐도 그렇다. 저 의자들이 대체 어디가 특별한 건지, 좋아할 만한 구석이 있기는 한 건지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 미국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행사용 간의 의자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나는 이 글의 처음에 키보드를 샀다고 썼다. 텐키레스에 무접점이라고, 포각포각 소리가 너무 좋다고도 썼다. 난 키보드가 좋다. 그 세련되고도 아날로그적인 기능미가 좋다. 기계식은 역시 체리 축이 갑이라고 확신하며 언젠가는 많은 돈을 들여 커스텀 키보드도 하나 만들어 볼 생각도 하고 있다. 이번에 구입한 키보드는 9만 2천원이었다. 9만원? 왜? 그냥 만 원 짜리 키보드도 충분하지 않아? 나는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사실 똑 부러지는 설명은 궁하다. 만 원 짜리 키보드나 지금 내가 두드리고 있는 키보드나 본질적인 기능의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이게 눌렀을 때 느낌이 더 좋아,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플라스틱 의자로 돌아가보면, 나는 여전히 플라스틱 의자가 다 거기서 거기이며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나의 취향일 뿐 다른 사람도 그래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누가 나에게 플라스틱 의자의 위대함을 설파하려고 하면 나는 아마 짜증을 내겠지만 그렇다고 플라스틱 의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한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근본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타인의 소관이 아니다. 우리는 주류에 동승해 비주류를 조소하는 데에는 너무 익숙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 조소의 대상이 되면 견디지 못하며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도 좋아해야 할것만 같은 압박감마저 느낀다. 소위 트렌드의 대부분은 그렇게 형성된다.
어느 방송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아마 라디오스타였던 것 같은데) 가수 이적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이적은 소설가로도 책을 낸 적이 있는데, 그 책에 수록된 단편이었던가 아니었던가 아무튼, 어느 날 밤에 친구 두 사람이 비밀스런 만남을 가진다. 그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채, 촛불 하나만을 켜 놓고 숨죽여 이런 얘기를 속삭인다. 사실... 난 도어스가 좋은지 모르겠어. 나도야. 난 지미 헨드릭스가 그렇게 대단한지도 모르겠다니까. 이해해. 우리 이 얘기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
도어스(The Doors)는 미국의 전설적인 사이키델릭 락 밴드이다. 내 나이상 그들의 전성기를 본 적은 없지만, 락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소위 음악 좀 듣는다면 도어스를 좋아해야 한다는 스노브적인 분위기가 형성된(그리고 불호와 이견은 단순한 식견의 부재로 치부되는), 지금의 라디오헤드나 에이펙스 트윈같은 느낌의 아티스트였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따라서 이 두 친구는 사실은 도어스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사실은 도어스가 좋은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일은, 그들에겐 거의 어떤 저항 운동 수준의 용기를 요하는 것이다. 주류의 취향에 동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그만큼 강렬하다. 비주류의 취향을 자백했을 때 받아내야 할 비웃음 덕이다. 반대로 주류의 취향을 가장했을 때에서 오는 소속감과 우월감은 중독적으로 달콤하다. 누구도 비웃지 않으면 누구도 비웃음당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원리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란 나무와 같소. 당신도, 버찌가 열리지 않는대서 무화과나무와 싸우지는 않겠지?"
사람이란 결국 제각각의 나무이며 제각각의 열매를 맺는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선택이 아니며, 그 필연을 교정하려고 하는 시도는 무용하고 무익하다. 아무리 흔들고 발로 걷어찬대도 무화과나무에는 무화과가 열린다. 정직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무화과나무에서 버찌를 요구하는 이들을 많이 알고 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다.